이곳 에베소가 로마시대에 소아시아 500여개의 도시들의 수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찬란했던 역사를 상상하는데 그리 큰 어려움이 없다. 당시 에베소는 소아시아에서 모여드는 곡물과 상품들을 수출하고 수입하는 해상무역의 중심지로서 부유한 상인들이 많았다. 인구는 20만이 넘는 대도시였다. 매년4/5월에는 아르테미스 여신의 축제가 벌어졌고 당시에 거의 유일한 문화활동인 연극을 보러 대규모 반원형 극장이 있는 에베소로 주변 도시들뿐 아니라 로마, 아테네와 예루살렘에서도 찾아 왔다. 이 지역은 동과 서를 잇는 중요한 지리적 요충지에 세워졌을 뿐만 아니라 자연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다. 수십 킬로 밖에서 물을 끌어오고 대리석 포장도로로 인해 흙을 밟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며, 목욕문화를 즐기고 책을 읽으며 생활할 정도로 현대의 도시 모습을 창조했던 에베소는 소아시아 최고의 항구도시로, 로마시대에는 로마 다음가는 도시로 번성하였다. 그러나 자연환경으로 인해 급격히 쇄락의 길을 걷는다. 지진과 화산으로 바다 밑 지각이 융기하는가 하면 지형이 변하면서 항구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된다. 10세기부터는 아예 물이 범람해 물웅덩이가 생기고 그 웅덩이에 서식하던 모기가 말라리아를 창궐시켰다. 소아시아와 지중해, 에게해 연안의 최대의 항구도시 에베소는 이후로 버려진 도시가 된다. 특히 수 차례의 지진과 화산활동은 한때 찬란한 문명을 꽃피웠던 에베소를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잿더미 속에 묻어버렸다가 150년전에야 발굴하게 된다.
그 길의 항구 반대쪽에는 대형 반원형 극장이 나온다. 오른쪽, 왼쪽 그리고 앞쪽에 위치하는 벽으로 둘러싸인 극장은 파나르 산의 서쪽자락에 자리잡고 있다. 이 극장은 에베소 시대에서 오늘날까지 아주 잘 보존된 건물 중 하나이라고 한다.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41-54)에 의해서 개조된 이 극장은 2만4천명을 수용할 수 있도록 3단의 반원형의 관람석들은 각 단마다 22열로 구성되었다. 위에서 아래로 보이는 반원형극장의 직경은 50미터이며 극장의 핵심시설은 나선형의 공연장에 있었다. 2만4천여 명이 둥글게 모여 공연을 지켜볼 때 공연하는 사람이 작은 목소리로 말해도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들을 수 있도록 자연 에코시설이 돼 있어 맨 뒤 자석에서도 듣는데 문제가 없었다고 한다. 시험을 해 보려는지 아래의 공연장에 올라가서 소리를 내는 관광객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옆에 막고 있던 벽들이 무너져내려 에코 현상이 잘 안 되는지 제일 꼭대기의 끝자리에 앉아 있는 내게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내가 원래부터 왼쪽귀가 잘 안 들리니 그러려니 싶었다. 당시에 2만4천명의 관람객들이 공연의 한마디로 안 놓치려고 집중하여 아래를 쳐다보고 있던 모습이 상상이 되었다.
이 거대한 원형경기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지어졌다가 2세기경에 확장해 24,000명을 수용하는 객석을 갖고 있는 규모이니 꼭대기에 올라가 앉으면 그 거대함과 웅장함이 나를 압도한다. 아래 공연장소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인다. 반원 직경이 50미터인데 아래까지의 높이도 한 30미터 정도가 될까? 공연건물 위로는 항구거리의 기둥들과 항구거리가 보였다. 각이 마모된 대리석 돌 의자에 햇볓을 마주하고 앉아서 한 시간 이상을 얼굴이 타는 것도 모르고 넋 빠지게 옛날로마시대에서 바울이 이곳에서 복음을 외치던 광경을 상상했다. 이곳에서 각종 공연과 집회가 열리고 때론 검투사들끼리의 죽느냐 사느냐의 검투 경기와 죄인들과 맹수들 간의 피의 대결이 펼쳐졌다고 하니 그 때 그 야만의 시대도 연상해본다. 로마의 통치자들이 볼거리 즐길 거리가 많지 않았던 당시 시민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이러한 피의 향연을 펼쳤던 곳이다. 또한 이 원형경기장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시민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설교를 했던 곳이자 아르테미스 신상을 만드는 은장색들이 이곳에서 시민들을 선동하여 아데미를 경배하며 사도바울을 감금한 곳이다. 조그만 몸집의 사도바울이 이곳 에베소 시민들을 모아놓고서 “시민들이여 나는 원래 가말리엘의 문하생으로 로마 시민이고 예수를 대적하던 자였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리하면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담대히 외치던 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 하다.
원형극장에서 나와서 왼쪽으로 대리석거리를 따라서 200여미터를 걸어가면 대리석거리의 끝에 오른쪽으로 셀수스 도서관이 나온다. 대리석 거리는 이 도시의 중심 도로이다. 도로에는 눈에 뜨이는 하수도 시설이 있다. 도로의 왼쪽에는 8미터의 기둥들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길의 중간부분에 사창가로 가는 길을 표시한 대리석 돌이 바닥에 깔려있다. 발바닥이 그려져 있는데 발로서 사창가의 방향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그 발 사이즈보다도 작은 발을 가진 남자들은 들어오지 말라는 의미라고 한다. 위생적인 시설로 지어졌는데 건물 안에 들어가기 전에 남자들에게 손과 발을 씻고 들어올 것을 요구 했다고 한다. 마차가 지나다닌 길인 중앙로의 대리석은 닳고 닳아 반질반질하나 2천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포장도로 구실을 하고 있을 정도여서 세월의 풍상을 무색케 한다. 이 도시가 가장 번성했을 당시인 3,4세기엔 얼마나 웅장하고 화려했을까를 상상하면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현재의 건축 기술로 볼 때도 버금가는 기술력을 보여주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사진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했던 에베소 유적지의 하이라이트, 셀수스 도서관이 나타난다. 디벨리우스 셀수스가 로마시대 소아시아의 총독이었던 아버지 셀수스를 기념하기 위해 AD 110년쯤에 지어 소장 도서만도 12,000권이었단다. 종이가 로마에 전해지기 이전이어서 양가죽을 두루마리처럼 말아 책을 제작했다고 하니까 로마가 대제국을 그냥 건설한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셀수스 도서관 건물 대리석 기둥 사이사이에는‘지혜’, ‘지식’, ‘우정’, ‘이해’의 여신상이 조각돼있으나 눈에 보이는 것은 사실 전부 모조품이다. 진품은 오스트리아 비엔나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오스트리아가 발굴도중 빼앗아 간 것이다. 영국 대영제국 박물관이나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의 소장품 상당부분도 약탈품이다. 강대국들에 의해 무력으로 유적들을 빼앗기는 것은 할 수 없는가 보다. 셀수스 도서관은 1층은 이오니아식이고, 2층은 코린트 양식 건물로 웅장, 화려, 섬세함, 아름다움의 극치라고 평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여서 고대 건축물의 최고봉이란 찬사를 받을 만하다. 셀수스의 묘는 뒤쪽에 자리하고 있다. 셀수스 도서관 옆으로는 메제우스와 미트리아테스 문이 있다. 이 문을 지나면 아고라가 나온다. 2개의 문 위로 보이는 대리석에는 라틴어와 헬라어로 자신들을 용서하고 자유를 선사한 아구스도 황제와 아그립바에게 감사의 뜻을 담고 있다고 한다.
셀수스 도서관을 벗어나 뒤쪽은 아고라 광장이다. 아고라 광장은 그리스/로마시대에 남자들이 장을 보러 오면서 시국을 논하고 잡담하던 시민회관이다. 아고라 광장 우측은 각종 물품을 파는 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왁자지껄했던 시장골목이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 찾아오는 관광객들이 지나간 발자취와 그들이 흘리고 가는 음식물을 차지하려는 까마귀와 고양이들만의 보금자리가 됐다. 그 어떤 로마의 황제도, 그들이 세운 국가 조직도, 그리스 제국이나 로마제국이나 또는 비잔틴 제국이나 한때의 흥망성쇠가 한갓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다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님을 되새겨본다. 에베소의 유적들은 이러한 몇 천년의 역사 속에서 그렇게 말없이 유유히 흘러왔을 것이다. 현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관광의 즐거움과 역사를 회상하는 숙연함을 느끼게 하면서 말이다.
셀수스 도서관에서 헤라클레스의 개선문이 있는 언덕까지 이어지는 거리가 크레테스 거리이고 에베소 유적지의 최고봉이라 할 수 있다. 이곳 어귀에 한꺼번에 50명이 앉아서 생리적 현상을 해결했다는 수세식 유료화장실이 있다. 옆이 트인 커다란 방에서 함께 앉아서 생리현상을 해소했던 것이다. 목욕한 물이 가장 먼저 흘러나오는 위치에 있는 앞쪽의latrine이 가장 비쌌다고 한다. 유료 화장실과 붙은 곳에 공중 목욕탕이 있다. 이 목욕탕은 2천년전에 이미 중앙의 보일러에서 물을 데워서 각방으로 뜨거운 물을 보내는 중앙 난방시설을 갖추었고 냉수, 온수 그리고 미지근한 물의 3개의 탕을 갖추었다. 탕 옆에는 탈의실도 갖추고 수 백 명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이다. 공공의 탕도 있지만 귀족을 위한 개인 탕들도 있었다. 오늘날에는 3층만 남아있다. 거기서 나오면 크레테스 거리를 따라서 언덕을 올라가게 되어 있다. 크레테스 거리 역시 바닥이 대리석 돌로 깔린 도로이고 양 옆에 상점, 귀족들의 집터, 모자이크 바닥 등 당시의 삶의 흔적과 생활상이 생생히 녹아있는 곳이다. 이제는 기둥들과 건물의 흔적들만 남아있다. 더 오르다 보면 왼편에 보이는 신전이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무고로 사형을 당한 아버지 테오도시우스 장군을 기념하여 신전을 지어 개방했다. 이 주변의 유적들과 집들은 당시 부자 촌 이었다. 언덕을 다 올라서 뒤를 돌아보며 셀수스 도서관 뒤로 보이는 경치는 유적들과 어우러져서 참으로 아름답다. 그리스/로마 시대의 건축물들은 기하학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구조적으로나 이렇게 자연과 조화롭고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창조했는지 그 시대의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게 된다.
크레테스 거리의 언덕 끝부분에 그 유명한 니케의 여신상(승리의 여신)이 있다. 날개 달린 승리의여신상이다. 왼손에는 승리의 상징인 월계관이 오른 손에는 밀 다발을 들고 있다. 세계적인 스포츠사의 나이키(NIKE) 로고가 니케 여신상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 모양을 형상화했으며 이 형상을 새긴 운동화들이 이제는 명품 운동화로 지구상을 뒤덮고 있다. 니케 여신상의 가슴을 만지면 행운이 온다 해서 가슴 부분만 엄청 닳았다. 가슴을 만지면 복을 받는다는 믿을 수 없는 낭설로 인해 수많은 관광객들이 신상의 가슴을 만져 원래 D컵이었던 가슴 크기가 B컵으로 작아졌다는 말도 있다고 한다. 신상 앞에 한 10분 서있던 것 같은데도 수많은 지나가는 여행객들이 남녀 할 것 없이 신상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후 신상의 가슴을 만지고 지나갔다. 나도 누가 볼세라 조심스럽게 니케의 돌 가슴을 쓸어 보았다. 니케의 여신상과 메두사를 비롯한 다양한 아치형 신전, 로마 황제에게 바쳐진 신전 터, 극히 일부만 복원됐는데도 여전히 거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눈을 아주 바쁘게 움직여 로마시대의 흔적을 더듬어 둘러보다 헤라클레스가 조각된 개선문 앞에 이른다. 헤라클레스문은 지중해 부근 각지에서 운반해온 대리석기둥 6개로 만들어졌으나 지진과 화산폭발로 붕괴돼 현재는 2개만 복원해 놓은 상태다.
에베소의 또 다른 유적지는 성 요한 교회와 성모 마리아 교회이다. 사도 요한은 에베소에서 살았고 요한복음을 여기서 썼다. 말년에 로마에 의한 밧모섬의 유배에서 풀려나서 요한 계시록과 요한 1,2,3서도 여기서 쓰고서 이곳 에베소에서 종말을 맞이 하였다. 또한 예수님에게 의탁 받은 친모 마리아도 요한이 이곳 에베소로 모시고 와서 살았다. 그들을 기념하여 그들의 사후도 몇 백년이 한참 지나 기독교가 로마의 공인된 종교가 된 이후에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가 생긴 것 같다. 그러나 그러한 기념교회는 내게는 별로 흥미가 느껴지지 않아 일부러 들러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미 예루살렘이나 나사렛에서도 후세들이 세운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들을 숫하게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후에 셀축의 호텔에 돌아온 이후에 호텔 옆의 공터 위로 큰 성채가 하나 보였다. 이 성채가 셀축 성이다. 셀축 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되어 있는데 5세기경에 에베소가 항구와 경제적인 중심지로서의 의미를 상실하자 이 성은 주변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셀축 투르크로 대변되는 침략군인 아랍군들에게 대항하기 위해서 비잔틴에서 7-8세기 경에 세워졌다. 언덕의 정상을 둘러싸는 내벽과 함께 지금까지도 굳건하게 서 있다. 그러나 성채 위로는 누가 지금의 주인인가를 상징하듯 셀축의 현재 점령국인 터키의 국기가 힘차게 나부끼고 있다 (셀축은 천년 전 투르크인의 또 다른 이름이다). 동, 서, 그리고 남쪽을 향하여 3개의 문이 있으며 4세기에 문들 사이에 바실리카(Basilica- 예배당)이 하나 세워졌으나 나중에 줄리엔 황제의 명령으로 그 자리에 사도 요한 교회와 요한의 묘가 만들어 졌다. 이 성채와 무덤은 아르테미르 신전을 내려다 보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을 셀축 성 보다는 사도 요한 성이라 부른다. 셀축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타킵 성문이다. 문은 아치 형태이며 함정에 빠진 적들을 집단 참수한 작은 마당으로 이어진다는데 내가 갔을 때는 문이 굳게 잠겨 있어 성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했다. 주변을 돌면서 사진만 찍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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