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이 이미 늦었기에 에베소(Efes) 유적지는 다음날 가보기로 했다. 대신 셀축(Selcuk) 역 앞의 광장 식당가에 가서 느긋하게 식사를 하였다. 지중해 연안의 식당가 들은 대부분 길거리에 식탁과 의자를 꺼내 놓는다. 이곳 광장도 식당들이 밖에 놓은 테이블과 의자들로 야외식당으로 바뀌었다. 식당 외에도 관광품 상점들과 커피집, 과일상점, 은행, 옷 집, 편의점 등이 몰려있는 이곳이 쎌축의 가장 번화가이다. 광장 앞 길에는 차도 못 다니도록 차단을 하였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분수 옆의 테이블에 앉았다. 5월중순의 날씨는 해가 내려가는 시간에도 매우 온화하다.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데다 바람도 불지 않아 야외에서 식사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다. 빈자리에 앉아서 노트에 새벽부터 바쁘게 움직였던 오늘 하루를 반추해 본다. 비둘기들이 식탁에서 던져주는 빵 부스러기에 우르르 몰려들다가 고양이들의 앞 발질에 쫓겨 도망간다. 빵 조각을 놓고서 고양이와 비둘기가 싸우는 것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다. 주변에 중국인들인지 젊은 부부들이 3쌍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 같다. 무슨 얘기들이 재미있는지 까르르 넘어간다. 이제 에베소는 세계 각 곳에서 찾아오는 매우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나 보다. 나 홀로 여행의 비애가 이렇게 혼자 식사할 때이다. 사진으로 된 메뉴를 들여다보다 왕 멸치(anchovy) 튀김과 셀러드가 있어서 시켜 보았다. 와인 한잔과 함께.. 손가락보다 더 굵은 멸치였다. 한 10여마리 넘게 수북이 튀겨서 갔다 주는데 내가 먹기도 전에 냄새를 맡고 주변에 고양이들이 몰려든다. 그래 너희들도 배고프겠지.. 꼬리와 머리 등은 고양이들과 나누어 먹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나중에 에베소 에서도 보았지만 이곳 터키에는 집 잃은 고양이들이 정말 많다. 그런데 시에서는 이 많은 야생 고양이들을 그냥 방치해 두는 것 같다.
다음날 호텔서 제공하는 아침식사를 하였다. 식당은 호텔 옥상의 테라스였다. 같이 식사를 하는 사람들끼리 인사를 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내 테이블에 같이 앉은 부부는 아르헨티나에서 왔단다. 옆 테이블의 가족은 뉴욕에서 왔다고 한다. B급호텔이었기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으나 나오는 것을 보니 휼륭한 아침식사였다. 빵과 계란과 셀러드에 과일과 커피까지.. 그래 오늘은 하루 종일 걸어야 하니 든든히 먹어두어야지.. 간단한 복장으로 백팩에 물병과 지도를 넣고서 길을 나섰다. 운동화 끈을 꼭 잡아 매었다. 셀축에서 에베소까지는 5km이다. 왕복 10km이다. 이것을 걸어서 갔다 오려고 한다. 셀축 중심가에서 남쪽방향으로 두 블락 후에 오른쪽으로 길을 바꾸어 그 길만 4 키로미터를 걸어가면 왼편으로 에베소 들어가는 사인이 나올 것이라고 호텔 주인 아저씨와 같이 지도를 보면서 길을 익혀 두었다.
오전 8시, 관광지에서는 조금 이른 시간에 길을 나섰다. 에베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이다. 이곳 터키의 아나돌루 서쪽에 위치한 에게 해안지역(Agean Seashore)에 와서 터키를 이해하는 방식은 ‘민족’이 아니라 ‘영토’로 접근해야 한다. 지금 현재 터키의 뿌리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비잔티움을 함락하고 이 땅에 제국을 세운 것은 1453년, 불과 6백60년 전 일이다. 그러나 이곳 아나톨리아에서 만나는 고대 유적들은 그리스/로마 시대의 것들이다. 2천, 3천년 전의 유적들이다. 히타이트로 시작해서 그리스에서 로마시대, 비잔틴에서 다시 투르크로 계속하여 이 땅의 주인들이 바뀌어 온 것이다. 호텔이 있는 셀축에서 에베소 사인을 보고서 오른쪽 길로 들어서자 마자 눈앞에 크게 들어오는 한글간판 하나가 있다. 태극마크와 함께 커다란 글씨로 “에베소 Restaurant” 간판, 한국음식점이다. 그러나 한글글씨가 커도 너무 크다. 몰론 한국사람들에게 잘 보이라고 그랬을 것이지만 터키인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은 무엇인가 의아해 할 것이었다. 나중에 에베소 유적지에 가서 알았지만 수많은 한국 단체 관광객들과도 마주쳤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으니 한국 식당도 생겼겠지. 그러나 어째든 반가웠다. 잘 되었다. 집을 떠나 김치를 못 먹은 지도 벌써 두주째.. 한국음식이 없는 상황에서는 별로 먹고 싶다는 생각이 안 들지만 한국음식점 간판을 보니 갑자기 매콤하고 얼큰한 한국음식이 먹고 싶어 입에 군침이 돌았다. 오늘 저녁은 되돌아 오는 길에 저곳을 들러서 김치찌개나 먹어야겠다.
에베소(Ephesus) 가는 길에 반드시 들려야 하는 곳이 아르테미스(Artemis Temple) 신전이다. 성경 사도행전 19장에 언급된 ‘아데미’ 신전이 이 곳이다. 나오는 아르테미스 신전은 쎌축 시내 큰길에서 남쪽으로 두 세 블럭 가다가 오른쪽으로 길을 꺾어서 3-400미터 정도 걸어가면 오른쪽으로 나왔다. 작은 분지 안에 자리했는데 원래 신전자리에는 건물터만 남아서 연못처럼 물이 차고 하나의 큰 기둥만 남이 있는 폐허이다. 이곳 건물터가 옛 아르테미스 신전자리이다. 연못이라고는 하지만 물이 괴어있는 속으로 건물의 기반 흔적들과 추춧돌 들이 보인다. 물속으로 개구리들이 숨바꼭질을 한다. 또한 건물터 주변으로 무너진 건물 기둥의 잔해와 부서진 조각들을 늘어 놓았다. 그리스/로마시대에 127개의 돌기둥이 세워진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이 자리잡고 있던 이곳이 옛 에베소인들의 종교 생활의 중심지였다. 물이 있는 자리에 신전이 있던 것은 신전 안에 목욕시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다 무너지고 하나의 기둥만 외롭게 남아있다. 하나만 남아있는 기둥 꼭대기에는 하얀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서 앉아서 우리를 내려다 본다. 남아있는 기둥인지 무너진 기둥 조각들로 하나만 다시 세운 것인지, 원래부터 남은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찬란했던 거대 신전의 자리엔 이제 외롭게 과거의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이 신전은 현재 발굴된 가장 오래된 건물을 기준으로 볼 때 BC 3세기경 세워진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문헌에 의하면 아르테미스 신전은 BC 6세기 중엽에 지어지기 시작해서 불에 탔다가 다시 복구되어 BC 3세기경에 완성되었다. 에베소의 풍부한 재정 능력에 의해 그리스 아테네의 파르테논(Parthenon Temple) 신전보다 4배 이상의 규모로 장대하고 화려하게 건축되었는데 바닥 면의 넓이가 가로 130m, 세로 70m, 높이는 18m 로 기둥은 무려 127개였다. 기둥 높이가 10m 에 불과한 파르테논 신전보다 8m 나 높은 18m 의 하얀색 최고급 대리석을 사용한 기둥이 127개로 사방으로 계단을 만들었다. 완성된 아르테미스 신전은 전세계에 그 아름다움과 웅장함이 널리 알려졌다. 에베소는 신전으로 인한 특수를 누리며 더욱 번영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에베소의 영화도 주 후 3세기경 고트인들의 침입으로 막을 내리게 된다. 고트인들은 신전을 모두 불태우고 파괴하였다. 이에 아르테미스 신전은 훼파 되었고 파괴된 신전에서 대리석을 가져가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신전은 완벽한 폐허로 변하였다. 현재도 이곳에 없는 것이 아르테미스 신상인데, 아르테미스 신상은 쎌축의 전시관이나 시내에서도 재현해 놓은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아르테미스는 여신이면서 유방이 여러 개 달린 다산(multi-reproduction)과 풍요의 신이다. 그 당시의 신전은 사실은 사창가였다. 신전에서 일하는 여제사들은 창녀들이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남성위주 사회였고 종교생활을 핑계 삼아 신전을 찾아서 자기들의 욕구를 해소하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도행전 19장을 보자. 바울이 에베소에 머물 당시 데메드리오라 하는 은장색이 있었는데 아르테미스(아데미) 신을 은으로 만든 조그만 모형을 팔았는데 그 벌이가 적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에베소 뿐 아니라 전 아시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아데미 신상을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고 숭배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바울의 말을 따랐다. 장사길이 막힌 데메드리오는 이 말을 작업장의 장인들에게 전하니 장인들이 분노하고 에베소에 큰 소요가 일었다. 아데미 신상을 만들어 팔던 은장색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크도다 에베소의 아데미여’를 외치면서 떼를 지어 중앙의 원형극장까지 걸었고 그 소리를 들은 많은 에베소 시민들이 동요를 하여 같이 시위에 참가 하였다. 이를 본 정치인들이 급히 모여 재판을 열었고 사도바울은 투옥이 되었다가 후에 에베소에서 추방이 되어 마게도니아로 떠났다는 사건이 행19장에 생생하게 언급되어 있다.
추방되기 전까지 에베소에는 사도바울이 적어도 2년3개월을 머무른 곳이다. 제 2,3차 전도 여행 때 에베소의 유대인 회당을 방문하여 3달동안 하나님나라를 강론하였으나 몇 몇 유대인들의 마음이 굳어서 바울을 비방하니 이후 그들을 떠나 장소를 옮겨 제자들을 세우로 2년동안 에베소에 머무르며 두란노 서원에서 매일 성경을 가르쳤다. 바울에 의해 최초의 신학교 두란노서원이 세워진 곳도 에베소이다. (행19:8-10). 바울은 에베소를 아시아 지역의 전도의 중심지로 삼았는데(행 19:10), 여기서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들을 썼다(고전16:8). 그러다가 먼저 언급한 아르테미스 신상으로 인해 소요가 일어나 쫓겨나게 된다. 나의 이번 에베소 방문의 목적도 바울의 손길이 있던 옛 두란노 서원의 흔적과 바울이 걸어 다닌 에베소의 옛 거리를 걸어보고 소요가 일어났던 원형극장을 둘러 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베소는 또한 예수님의 12제자중 가장 사랑 받던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한 곳이다. 물론 바울과 주거기간이 겹치지는 않는다. 사도요한은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로 일컬어지며 십자가 사건 당시 예수님에게서 직접 그의 모친 마리아를 부탁 받은 제자이다. 성령 강림 이후 베드로와 함께 예루살렘(행 3:1)과 사마리아(행 8:14)에서 선교 활동을 벌였다. 그러한 요한을 바울은 야고보, 베드로와 함께 ‘교회의 기둥’이라고 불렀다(갈 2:9). 전승에 의하면 44년 로마의 박해를 피해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함께 소아시아로 피신했으며 그 곳의 일곱 교회, 즉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및 라오디게이아 교회를 지도했다고 한다. 95년 로마 황제 도미티아누스의 기독교 박해 때 요한은 군병들에게 붙잡혀 밧모 섬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곳에서 요한계시록을 저술하다가, 96년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되자 사면 받아 다시 에베소로 귀환하여 요한 복음서와 요한 1,2,3 서신을 저술하였다. 사도 요한은 사도들 중에 유일하게 순교하지 않고 자연사를 맞이한 사도이다. 지금은 이곳에 사도요한 교회와 마리아 교회 등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에서 다시 에베소 가는 길로 나와서 걸음을 재촉했다. 에베소까지 걸어 가는 길은 너무나 멋졌다. 차도의 왼쪽으로 자전거 길과 인도가 따로 크게 만들어져 있는데 그 좌우로 나무들이 빼곡히 심어져 있는 것이었다.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난 길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어졌다. 이것이 에베소입구의 길까지 4 키로미터나 계속 되었다. 이런 길을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걷는 다는 것이 매우 운치가 있었다. 그런데 길 위에 떨어진 물컹한 나무열매들이 계속 걸어가는 발에 밟혀 터졌다. 하얀 꽃망울이 모인 것처럼 생긴 열매인데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열매이다. 열매를 밟으면 터지는 느낌이 좋지 않아서 밟지 않으려 피해서 걸었다. 그런데 앞에서 걸어오던 터키 가족들이 눈에 뜨였다. 아버지로 보이는 사람이 나무 위에 올라가서 흔들어 대면 아래서 가족들이 보자기를 들고서 떨어지는 열매를 받아낸다. 그때서야 알았다. 이 처음 보는 열매도 터키사람들은 먹는다는 것을… 한 4km를 걸어 갔을까, 큰길에서 다시 왼편으로 가라는 사인이 나온다. 이 길로 들어섰더니 인도 없는 도로만 나 있어 같은 도로 위에서 오고 가는 차들이 신경이 쓰인다. 에베소 유적지로 걸어가는 사람은 나 밖에는 없다. 이 길로도 1km는 더 걸어 들어가야 비로소 매표소가 있는 광장이 나온다. 광장은 버스 파킹장과 승용차 파킹장이 있고 더 안쪽으로 들어가자 식당들과 선물가게들이 나온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입장료가20리라(10불)였는지 잘 기억이 안 난다) 들어가면 처음 나오는 거리가 항구거리이다. 이 거리는 대형극장에서 옛 항구로 향하는 20미터의 넓은 대로로 양쪽에 5미터 높이의 기둥들로 둘러싸인 거리이다. 도시의 한복판인 이 거리는 황제 아카디우스에 의해서 395년에 만들어졌고 황제의 죽음 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Arcadian Road라고 칭한다. 길은 대리석으로 덮였으며 후에 발굴작업을 통해서 이 거리가 양초(candle)가 들어간 등으로 밤거리를 밝혔다는 것이 밝혀졌다. 전기가 없던 그 당시에도 가로등이 있었던 것이니 얼마나 부유했던 도시인가? 거리 밑에는 하수구까지 있다. 지금의 현대 거리와도 별반 다를 바가 없다. 이 거리의 끝은 항구이지만 먼저도 밝혔듯이 에베소는 상류에서 강으로 떠내려온 흙으로 인해 항구가 메꿔지고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지형이 변하면서 바다에서 10km나 내륙이 되어 버렸다. 아마도 항구가 항구로서의 역할을 못 할 때부터 에베소는 추락이 시작되고 잊혀진 도시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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