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이번 터키 출장의 공식적 업무가 다 끝나고 집에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그러나 내게는 휴스턴 복귀 일정을 몇 일 더 연기하여 터키내의 성경유적지를 돌아보려던 계획을 비로소 실행에 옮기는 시간이다. 사실 이번 성경 유적지 여행은 작년 터키의 첫 방문부터 호시탐탐 노리던 기회이다. 내년도에 휴스턴 교계에서도 터키/그리스의 성경유적지 방문계획을 알고 있지만 터키 유적지도 예루살렘 경우와 같이 내가 먼저 방문기를 쓰게 되었다. 이 글이 터키 방문을 계획하는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터키유적지 방문만을 목적하여 일부러는 못 가지만 터키에 간 김에 몇 일 여유를 부려 성경 유적지를 돌아보는 사치는 부려도 좋으리라 싶었다. 물론 이러한 개인적 추가 여행 비용은 출장비 외의 전적인 나의 비용이었다. 어차피 집에 일찍 돌아가 보아야 나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집사람과 딸은 오랜만에 방문한 장모님과 여자 3대가 함께 어머니 날 전후로 일주일간 크르즈 여행을 떠났다. 따라서 몇 일간 나 혼자 개인 여행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다.
터키 대리점 사장에게 나의 개인여행 계획을 얘기했더니 자기 일처럼 기뻐하면서 대신 일정을 짜 주겠단다. 방문지역 호텔예약도 대신 해 주겠다면서 일류 호텔체인 이름만을 늘어 놓는다. 개인여행은 저렴한 숙소와 저렴한 비용으로 하고 싶어하는 내 속마음도 모르고… 물론 무슬림인 대리점사장이 계시록의 7교회(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를 알 턱이 없었다. 그러나 희랍 유적지로 유명한 에베소는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에베소 여행에 필요한 많은 팁을 받았다. 대리점 사장은 이미 내가 기독교인 인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터키내의 성경의 유적지에 관심이 많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둘러보고 싶다고 언급한 계시록의 7교회를 비서에게 부탁하여 인터넷을 뒤져서 열심히 찾아보더니 옛적 지명에서 지금은 바뀐 터키의 지역 명을 찾아서 위치가 있는 지도와 함께 넘겨준다. 또한 에베소 유적지에 대한 많은 자료를 출력하여 바인딩 하여 만들어 준다.
에베소(Ephesus)의 현재 지명은 에페스 (Efes)-또는 셀축(Selcuk), 서머나는 (이즈미르), 버가모는 (베르가모), 두아디라는 (아르히사르), 사데는 (사르데), 빌라델비아는 (알라쉐히르), 그리고 라오디게아는 (데니즐리)이다. 여기에 더하여 내가 추가로 가 보고 싶었던 곳이 드로아 이다. 드로아는 바울이 2차 전도여행 때에 소아시아에서 에게 해(Agean Sea) 바다를 앞에 두고서 길이 막혀 다시 아시아로 되돌아 가려다가 꿈에 마게도니아(유럽)에서 “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환상을 보고서 바다를 건넌 곳이다(행16장). 바울의 2차 전도여행에서 복음이 다시 아시아로 되돌아오려던 찰나에 유럽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 역사적인 도시이다. 그런데 이 곳은 우리가 희랍문학작품 오디세이아 에서 잘 알려진 ‘트로이의 목마’ 가 보내진 트로이(드로아)와 같은 도시이다. 지금도 이 도시에 가 보면 트로이의 목마 모형이 서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는 이번 여행에 드로아 에는 못 가 보게 된다. 나중에 기회가 또 있겠지...
이 모든 도시들의 중심은 이즈미르-Izmir (옛 서머나-Smyrna) 이고 이 지역을 잇는 공항도 이즈미르 공항 밖에는 없다. 따라서 시간이 많이 없는 나는 일단 비행기로 이즈미르에 가서 렌터카를 빌리던, 버스를 타던, 펙키지 관광이던 현지에서 제대로 알아보고서 계획을 세우기로 하였다. 이스탄불 곡센 공항근교의 호텔에서 체크아웃 하여 아타투르크 공항근교의 호텔로 옮겼다. 보통 이스탄불의 곡센 공항(Goksen Airport) 에서 아타트르크 공항(Attaturk Airport)까지 보스포러스 해협(Bosphorus Starit)을 건너는데 차로 움직이려면 3시간이 넘게 걸리는 것을 감안하면 다음날 오전 8시 이즈미르(Ismir) 행 비행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함이다. 아타트르크 공항 앞길 대로변의 오사카호텔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름만 일본식이었지 호텔의 내부장식이나 다음날 아침 식사 메뉴 등에서 전혀 일본냄새를 찾아볼 수 없었다.
아침식사는 지중해식 부페였다. 수많은 색과 맛의 올리브 피클들이 나의 눈을 즐겁게 한다. 터키식으로 우유를 발효하여 나온 요구르트에 물을 타서 음료수처럼 식사 때마다 들이키는 ‘아이란’ 이란 이름의 텁텁한 음료도 내 입에 맞았다. 과일과 야채도 비타민C가 많은 것으로 챙겨 먹었다. 이제부터 몇 일 간은 험난한 개인여행으로 건강식으로 잘 먹어두어 체력도 높이고 면역력도 높여야 한다. 나는 해외 여행에서 조금만 목이나 코에 이상한 신호가 오면 따듯한 소금물로 목과 콧속 청소를 하곤 한다. 콧속에서 번식을 시작하려는 감기 균을 소독하는데 더운 소금물처럼 좋은 것이 없다. 이것은 해외 여행시 감기/몸살에서 나를 지켜주는 비결이다. 일년의 반은 해외 출장으로 나가서 생활하는 나는 50대 중반의 나이에 세계 각 도시들로 계속 이동해야 하는 무리한 스케줄을 유지하려면 건강에 특별히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따라서 아직도 매일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걷는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걷는 것은 물론이고 공항이건 어디건 여행 가방을 들고 있지 않는 한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 등은 사양하고 계단을 찾아서 오르고 내리곤 한다. 계단이용은 심장 건강에도 좋다.
이즈미르(Izmir) 까지 왕복 비행기로 갔다가 돌아와서 같은 호텔에서 일박을 하고는 다음날 아침에 휴스턴으로 돌아가야 했기에 나머지 짐을 호텔에다 맡기고는 백팩 하나에 최소한의 필요한 짐만을 꾸리고 나섰다. 속옷 하나의 무게도 부담되어 줄일 수 있을 만큼 줄였다. 5월 중순의 소아시아(현재의 아나돌루 반도) 지방은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아 가방에 비옷 대용으로 쓸 수 있는 가벼운 봄 자켓 하나를 추가하면 단벌 여름옷과 야구모자 만으로 간편하게 여행하기에는 아주 좋은 계절이다. 땀에 밴 옷은 밤에 빨아 널면 아침이면 말랐다. 마르지 않으면 헤어드라이어로 말리면 되었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노트북 컴퓨터도 백팩에서 제외했다. 혹 급하게 필요한 파일도 있겠지만 몇 일 간은 그런 일이 없기를 빌었다. 긴급한 업무연락은 스마트폰으로 해결해야 했다. 업무 출장을 가면 대리점에서 교통편이 제공된다. 차가 있으면 짐이 무거워도 상관없다. 그러나 개인 여행을 다니면 전부 손에 들고 다니면서 많이 걸어야 한다. 짐이 많고 무거우면 정말 피곤하다. 때에 따라 하루 종일 걷기도 해야 하므로 가볍게 다니는 것이 몸을 덜 피곤하게 만든다. 하나라도 짐을 줄이는 것이 상책이다.
비행기가 이륙 후 한 시간도 안되어 벌써 이즈미르 항구도시가 비행기 창문을 통해서 눈 안에 들어온다. 하늘에서 보는 이즈미르는 일률적으로 빨간 지붕들의 집들과 높지 않은 빌딩들이 만(bay)을 둘러싸고 만들어진 도시가 탁 트인 에게해의 푸른 바다와 어울려 참 아름다운 그림을 만든다. 고대 도시의 유물과 현대도시가 멋진 조화를 이룬다. 8시 정각에 떠난 비행기가 이즈미르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9시이다. 이즈미르 공항에 내리니 터미널에 바로 메트로 정류장이 붙어있고 시내까지 가는 기차가 있었다. 이런 행운이… 시내까지 편하고 싸게 갈수 있었다. 시내까지의 요금이 1.5리라(75센트)에 불과했다. 나중에 이즈미르에서 에베소가 있는 셀축(Selcuk) 까지도 기차를 타게 되는데 한 시간이나 걸리는 이 만만찮은 거리의 기차요금이 겨우 5리라(2.5불)였다. 이스탄불에서는 두 개의 공항을 오가면서 택시비로만 100불을 쓴 것을 생각하면 이즈미르는 싸도 너무 싸다. 이즈미르에 가서 또 하나 발견한 것이 생활물가가 이스탄불에 비하면 말할 수 없이 싼 것이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가 아닌 평범한 이즈미르 이기에 보통 터키인 대상으로의 가격인 것이다. 재래 시장에 들어가서 궁금해서 물어본 생필품이나 과일들의 가격도 이스탄불에 비하면 무척이나 저렴했다.
이즈미르는 항구도시이며 인구는 3백만명으로 현재 터키의 제 3대 도시이다. 이스탄불의 남서쪽 에게해(海)에 면한 대도시로 예전에는 서머나라고 불렀다. 계시록의 7개 교회 중 하나인 서머나 교회가 있던 곳이다. 고대 그리스의 식민도시이며 그리스 시대에서 로마시대까지 그리스 상인에 의해서 무역이 번영하였다. 주변일대에 곡물, 목화, 올리브, 잎담배, 과일과 견직, 양탄자를 생산하는 배후지를 끼고 있는데다가 면직물과 염색공업이 활발하여 상공업 중심지이며 전국으로 연결되는 철도역이 있어 터키 제1의 수출무역항으로 활기를 띠고 있다. 사실 이즈미르 항구는 고대 그리스시대나 로마시대에는 작은 항구도시였다, 이즈미르에서 한 50kM 떨어진 옆 동네의 에베소가 더 큰 항구도시였기 때문이다. 그리스와 로마시대에는 모든 무역은 에베소로 향했다. 바울이 활동하던 1세기 당시에는 에베소는 그리스의 아테네,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함께 3대 항구도시였다. 그러나 에베소는 강으로 흘러내려와서 쌓이는 퇴적층으로 인하여 점점 뱃길이 막히면서 더 이상의 항구로서의 역할을 못하게 되고 역사에서 쇠퇴한다. 이 틈을 비집고 이즈미르가 소아시아의 대표적 항구도시의 역할을 대신 떠 맡는 것이다.
이즈미르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종착역이 센트럴 기차역이다. 기차역에서 내려서 바다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역 주변에는 온통 상점 들 뿐이어서 어디로 가야 바다가 나오는지를 몰랐다. 우왕좌왕 하다가 택시회사 앞을 지나게 되었다. 택시들이 줄지어 서있는 앞에서 영어가 되는 주인이 지나가는 나에게 어디서 왔느냐면서 택시를 타라고 한다. 나는 걸어서 에게 해의 바다가 보고 싶어서 바다를 찾아가는 중이라 했더니 영어로 된 시내 상세지도를 하나 내게 가지라고 건네어 준다. 그래서 계시록의7교회 도시 지명들을 보여주면서 앞으로 어떻게 여행해야 할지 자문을 구했더니 자기 택시를 이용하라고 농담 하더니, 렌터카를 빌려서 직접 운전하는 안은 터키의 복잡한 길에서 길을 잃을 염려가 있으니 잊어버리란다. 차라리 기차로 관광 중심지 에베소가 있는 셀축을 가서 그곳 여행사에서 다양한 여행 펙키지를 고르는 것이 좋을 것이란다. 확실히 이곳 이즈미르 사람들은 이스탄불의 장사치들 보다는 여행객들에게 더 친절하다.
땀도 식힐 겸 메일도 체크할 겸 wifi 가 연결되는 식당에 들어가서 이곳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차이(홍차)를 시켰다. 지도를 펼쳐서 자세히 보니 이즈미르는 걸어서 한나절 들러 볼만한 곳이 대충 정해진다. 고대의 아고라(Agora)에서 대리석의 열주가 있고 이곳에서 포세이돈과 데메테르의 상 등이 발굴되었고, 파구스의 언덕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무장이 축조한 성채가 있다. 방문해야 할 곳으로 동그라미를 쳤다. 고대 아고라(Agora)는 시장이면서도 정치 이야기를 나누던 곳이었다. ‘모이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아고라에서는 물건을 사고 파는 시장이 생겨났는데 당시에는 남자들이 시장을 보러 왔으므로 자연스럽게 잡담과 토론의 장이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아고라는 고대 그리스 도시의 중심지였다.
사실 서머나 교회가 있던 성경상의 옛 서머나 라는 도시라고 알고 왔지만 고대 아고라(Agora)와 언덕의 성(Fort) 외에 성경의 유적지를 찾아 보려면 어디를 가야 할는지는 막연했다. 그런데 지도를 자세히 보니 유대인 회당(Jewish synagogue)이라는 곳이 보였다. 장소도 고대 아고라가 발굴된 곳에서 큰길 건너이다. 그래 이곳이야! 무릎을 쳤다. 성경에 보면 바울과 신라가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도시들을 방문하게 되면 반드시 먼저 유대인 회당을 찾았다. 유대인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고 유대인 회심자들을 중심으로 교회가 세워지고 이후에 교회에 이방인들이 합류하곤 했다. 이제는 이즈미르로 이름이 바뀐 서머나에서도 유대인 회당을 찾으면 옛 서머나 교회의 흔적이 찾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울이 옆 동네 에베소 에서는 에베소 교회도 세우고 3년이란 기간 동안에 두란노 서원이란 신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지만 서머나에도 들렀는지, 서머나교회 설립에도 관여했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길이 없다. 다만 거리상으로 50키로미터로 가깝기에 그럴 것이란 추측을 할 뿐이다.
성경을 보면 서머나 교회는 작은 교회였지만 주님께 칭찬을 듣는 교회였다. 궁핍에 처해 있었으나 사실은 부요한 교회라고 기록되었던 것이다. 일곱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 교회와 서머나 교회만이 예수님께 칭찬을 받았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굳건한 믿음을 지키고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신다고 약속을 받은 교회였다. 고대 문헌에 의하면 서머나에는 많은 유다인들이 거주했으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다. 유대인들은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기 위해 많은 돈을 내놓을 정도였다. 이 도시에서 세력을 얻은 유대인들은 기독교 신자들을 핍박하였다. 따라서 서머나 지역에 살며 신앙생활을 했던 이곳 신자들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더 많은 순교자를 내며, 믿음대로 살아갔다. 그들은 유다인들의 핍박뿐만 아니라 로마제국으로부터도 큰 핍박을 받으며 살아야만 했다. 또 신자들은 궁핍했다. 로마 시대에는 중산층이 거의 없어 가난한 자와 부유한 자로 나뉘었다. 기독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 받았던 신자들이었다. 서머나에서 중요한 인물은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캅 이다. 그는 2세기경 서머나의 주교였다. 그는 서머나에서 로마군사에게 체포됐고 배교를 거절해 결국은 순교했다. 그는 교인들에게 복음대로 생활할 것과 왕과 통치자, 적과 박해자들을 위해 기도할 것 등을 권고했다고 한다. 그는 신자들에게 신앙을 포기하지 말고 끝까지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했던 것처럼 자신의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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