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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 - 성경유적지 1

      날짜 : 2014. 08.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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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터키의 이스탄불(Istanbul)에 온 김에 1,700년전 이곳에서 시작된 기독교의 3대 분파로 꼽히는 동방정교(Eastern Orthodox)에 대해서 알아보자. 우리는 기독교의 분파 중 로마가톨릭 (Roman Catholic)과 중세시대에 종교개혁을 통해 로마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한 개신교라고 불리는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Church)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동방정교(Eastern Orthodox)도 현재 2억에 가까운 신자들이 러시아와 그리스 및 동유럽 등 세계 각 국에 분포된 제3대 기독교 분파이다.  1세기 예수님의 십자가/부활 사건이 일어난 이후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부흥하던 초대 예루살렘교회는 당시 점령군이었던 로마제국의 박해가 일어나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각지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이후 기독교인들이 비로소 세상에서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 일컬음을 받게 된 때가 서기 40년경에 시리아의 안디옥 (Antioch, Syria) 교회 때이다.

        이후 안디옥 교회의 선교사로 파송 받은 바울을 통해 에게 해(Agean Sea) 연안 주변의 희랍문화 (Greek Culture) 지역인 현재의 터키 소아시아 서편 지역과 그리스(당시는 하나의 문화권)에 복음이 전해지고 고린도, 에베소, 빌립보 등에 기독교 교회들이 생겨나게 된다. 바울은 이곳에서 왕성하게 복음을 전하고 성경을 기록하고 가르친다. 이후 바울은 당시의 세계를 움직이던 로마제국의 수도인 로마에까지 가서 옥중에 매인 몸으로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한다. 이것이 성경과 역사가들이 알려주는 기독교와 교회의 시초이다. 그러나 초기의 기독교는 세가 약하였다. 300여년 가까이 카타콤과 같은 굴속에 피하여 로마제국의 핍박을 이겨내면서 살아남는다. 그러다 서기 313년 기독교역사에 큰 획이 그어지는 일이 일어난다.  세계를 호령하는 로마제국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가 먼저 믿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으로 개종 되는 것이다.

        서기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로마제국에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의 박해를 중지하고 기독교를 로마제국의 공식종교로 공인하게 된다. 박해 받던 기독교로서는 천지가 개벽하는 일이 드디어 일어난 것이다. 이후 324년에 지금의 이스탄불에 비잔티움(Byzentium)이란 이름으로 로마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여노바 로마’(Nova Roma-새로운 로마)라는 기독교 국가를 건설하여 로마제국을 이탈리아에서 보스포러스 해협 남 서편으로 옮기게 된다. 먼저의 글에도 언급했듯이 보스포러스 해협의 남서쪽은 이곳이 동양과 서양을 잇는 무역로인 실크로드의 종착역이고 동서 교역으로 많은 부가 축적되는 전략적 요지였기 때문이다. 천년왕국 비잔틴(Byzentine)의 수도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사후에 그의 이름을 따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이름을 바꾼다. 이곳이 14세기에 오즈만 투루크에 함락된 이후의 이름은 이스탄불이다.

        그러나 비잔티움으로 로마의 수도를 옮긴 것이 로마 가톨릭과 비잔틴의 천년 냉전의 불씨가 된 것이다. 초기에는 로마와 비잔틴이 교구만 나뉘어 같은 종교지도자 공의회로 모이는 이웃이었다. 그러나 교구간의 대립이 점점 심해지고 결국은 로마중심의 로마가톨릭과 비잔틴중심의 그리스정교회로 나누어지고 동로마제국 서로마제국으로 불리게 된다. 이후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양 제국의 교회가 정치까지 장악한다. 이렇게 갈라진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는 서로간에 반목이 점점 심화되고 헤게모니 쟁탈전이 벌어진다. 우선 가장 큰 원인은 교리에 대한 이해가 서로 달랐다. 비잔틴 동방교회는 교리상의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최고회의인 공의회라고 주장하였고 서로마 교회에서는 공의회 서열 1위인 로마교황이 교리를 확정하거나 영적, 세속적 지배권을 가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교황의 권위를 인정하느냐 또는 무시하느냐는 누가 헤게모니를 쥐느냐의 차이점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서로 불만이 쌓이던 양대 교회의 실제적인 분열의 계기는 11세기에 로마의 예루살렘을 향한 십자군원정이다. 역사적으로 가장 어처구니 없었고 어리석었던 전쟁으로 알려진 예수의 이름을 앞세운 십자군 전쟁이었다. 십자가를 앞세우고 무력의 힘으로 무슬림들이 차지하고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겠다고 로마에서 시작된 십자군은 죄 없는 무수한 피해자들을 나았고 지금까지도 아랍권과 기독교국가들간의 치유되지 못하는 깊은 상처가 되어 현재도 여전히 문화와 종교적 충돌의 뿌리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전쟁은 기독교와 아랍권과의 충돌만이 아니었다. 로마 소속 군대는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비잔틴에서도 약탈과 방화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십자군들은 콘스탄티노플에서도 일반 약탈뿐 아니라 정교회 성당의 제단 장식, 십자가와 성상, 성인들의 유해 등도 약탈 했다. 성당의 청동 지붕을 벗겨내어 무기를 만들기도 했다. 동방정교의 반 로마 감정이 이제는 서로 돌아오지 못할 강을 건넌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로마 교황의 세력이 가장 위세를 떨치던 때에 일어났다. 중세에는 고생스러운 여행과 위험을 겪으며 예루살렘 성지를 참배하면 영혼의 구원을 얻는다는 엉터리 교리를 가르치면서 순례가 중요시 되었다. 그러나 중국북방에서 이주해 오면서 무슬림으로 개종된 셀주크 투르크(돌궐족으로 현 터키민족) 11세기에는 이라크의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비잔틴을 격파하여 소아시아를 점령했으며 시리아와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땅을 점령하게 된다.  이 점령자들은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기독교인들을 학대하였다. 따라서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을 셀주크의 손에서 탈환해야 하겠다고 결정했을 때 마침 비잔틴 제국이 셀주크의 공격을 받아 서유럽에 도움을 요청한다.  이렇게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200여년이나 계속되고 동서 로마가 갈라지는 계기가 되고 동로마인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은 결국 셀주크 투르크에게 점령되어 600년 영화의 오즈만 투르크 (Ottoman Empire) 제국이 탄생되는 것이다.  

        동로마 제국이 건재했던 시절에는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가 중심이었으나 1453년 동로마 비잔틴 제국이 오스만 투르크에 정복당한 뒤 정교회는 러시아 제국으로 옮겨져 러시아 정교회(Russian Orthodox)가 중심이 되었다. 정교회는 로마 카톨릭과 비슷하게 전통을 중요시하며 주로 동유럽과 중앙아시아에 퍼져 있다.  그리스, 러시아 및 발칸반도 국가들이 정교회 국가들이다. 동방정교회(Eastern Orthodox)는 비잔틴제국이 몰락한 이후 그 구심점이 러시아로 옮겨갔고 이후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정교회로 자리잡았다. 그 이후 러시아가 공산화되면서 한동안 침체되었던 동방정교회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후반의 구 소련 해체 이후다.  이름은 역사적으로 '동방정교회' (Eastern Orthodox) 혹은 '희랍정교회'(Greek Orthodox)로 불려왔지만, 세계화가 된 근년에는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불린다. 이제 정교회는 미국에서만도 600만 이상의 신도들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이슬람 국가가 되어버린 터키에는 박물관이 되어버린 비잔틴시대의 아야소피아 성당 건물 외에는 남아있는 정교회 교인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2000년전 바울이 3년간 머무르면서 성경을 가르쳤던 소아시아 지방의 에베소나 계시록의 7개 교회 등에도 역사의 유물은 남았을지 몰라도 기독교인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는다. 바울의 1,2차 선교지였고 요한계시록 7개 교회가 위치해있던 소아시아는 지금은 철저한 무슬림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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