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세월호 사건으로 마음 졸이며 기도하던 답답한 시간 동안 뉴스 미디아를 통해 매일 새롭게 들쳐지는 치부들은 그리 놀랍지도 않다. 한국사회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이제 서로간의 불신을 드러내놓고 얘기한다. 직업적 윤리의식이 결여된 사람들이 귀한 생명들을 위탁 받는 자리에 있다가 이런 엄청난 사고를 냈다. 당연히 존재하는 줄 알았던 안전규정은 전혀 지켜지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한국사회의 불만 게이지가 위험수위에 달해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편법, 불법에 무감각한 우리 기성세대 모두가 이번 사건의 공범이다. 요즈음 지면에 넘쳐나는 비판하고 조소하는 그런 류의 컬럼에 일조를 하자고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번 사건으로 나 자신과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자 함이다. 한국사회에는 편법과 불법이 아직도 판을 친다. 글을 쓰는 나 자신도 이런 부끄러운 사회적 분위기에 분명 일조를 하였다. 내가 이런 류의 비판에서 절대로 자유하지 못하다. 사회에 만연한 불법에 일조한 어른의 한 사람으로 아이들에게 상당히 부끄러움을 느낀다. 나름 대로는 이번 사건은 진리대로 삶을 살아내지 못하는 못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경종이라고 느낀다.
내 자신이 기독교인이다 보니 미국과 한국 그리고 세계 곳곳을 출장 다니면서 혹 만나게 되는 한국사람들 중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이다. 그러나 대화를 나누다 보면 서로의 윤리의식이 어느 정도 드러난다. 사회를 진리로 변화해야 하는 책임을 받은 기독교인들 사이에서도 세상과 다를 바 없는 대충대충과 편법 및 불법에서 자유한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부패한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구별되었다고 감히 세상에 대고 말할 수 있을까? 이번 사건에 가해자로 관여한 수많은 선사측과 선원들 및 해경과 정부인사 등 지도자적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종교를 조사해보면 현재 한국사회의 기독교 분포와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있는 자리에서 소금 역할로 사회를 부패로부터 구해야 할 한국교회가 부패에 동화되어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히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요즘의 한국의 기독교는 사회로부터 ‘개독교’라고 조롱 당한다. 가슴 아픈 현실이나 그 조롱에도 사회가 교회에 기대했고 또한 그 기대가 충족되지 않아 실망한다는 메시지가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미국에는 Christian work ethics 라는 말이 있다. 말 그대로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는 사람들에게 붙여진 칭찬과 같은 말이다. 사회의 일원으로 직장에서 어떠한 일을 맡았던지 진리대로 자기가 해야 할 일들을 묵묵히 그리고 성실히 해 내는 사람들을 일컬었다. 미국에 건국초기에 영적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고 이후에 누가 보던지 안보던지 삶의 일터에서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성실하게 자기 소임을 다하자는 진리운동으로 이런 훈장과 같은 말이 생겼다. 이제는 많이 퇴색되었지만 그러한 일터의 분위기가 사회로 파급되어 초기 미국사회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정직하고 성실한 기독교적인 윤리의식을 가진 구성원이 많은 국가를 우리는 선진국이라고 부른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크게 부흥하였지만 기독교인의 윤리의식을 사회가 전혀 인정해주지 않는다. 기독교인들도 별로 윤리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는 많은 수가 교회의 지도자들임이 들어나서 교회가 창피를 당하곤 한다.
나는 한국의 기계 제작업체에서 해외영업을 하고 있고 휴스턴의 제작업체에서도 일을 해 보았기에 양쪽 사회를 다 경험하였다. 한국이건 미국이건 공장에는 안전규정 매뉴얼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 안전규정을 잘 숙지해야 하고 실지로도 꼼꼼하게 지켜지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대부분 거의 무시해도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있다. 미국업체는 매주마다 안전에 대해서 토론하고 서로 감시한다. 안전규정은 누구나 예외 없이 반드시 지켜야 하는 절대 법이다. 따라서 안전사고도 거의 없다. 그러나 한국에서의 안전규정은 문서로만 존재하는 장식품이다. 성실하게 지키려 하는 사람은 바보라고 조롱 받는다. 작년엔가 한국에서 트럭운전수가 DMB로 TV를 시청하면서 운전하다가 길옆의 사이클 선수들을 덮쳐 죽인 일이 있다. 그 이후 한국에서 운전 중 DMB 시청은 불법이 되었지만 지금도 한국에 가면 택시운전수들이 DMB TV를 틀어놓고 운전한다. 운전수에게 정색하고 꺼달라고 요구하면 마지못해 끈다. 안전 불감증이고 법을 우습게 아는 것이 일반적인 사회 분위기이다.
우리는 이웃 일본에 대해서 심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다. 실지로 일본정부는 매우 편협한 면을 보여준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한국의 1/10에도 못 미치는 일본이 더 바른 윤리의식과 근로의식을 가진 것은 어떻게 설명하는가? 일본국민들의 준법정신이 선진국 수준이다. 누가 보던 안 보던 일터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고 정직하게 하는 근로의식은 기독교국가들의 윤리의식 못지않다. 재작년 교토/오사카에 갔을 때 수많은 시민들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들을 자물쇠로 잠그지 않는 것을 차에서 내려 실지로 확인하고는 놀랐던 적이 있다. 나는 기계를 팔러 세계 각국으로 다닌다. 각 나라 기계의 품질은 노동자의 윤리의식에 비례한다. 한중일 삼국의 기계 품질에 대한 구매자의 평가는 그 나라의 윤리의식을 그대로 나타내 준다. 일본기계의 품질을 독일만큼이나 높게 쳐 주는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래서 세계는 일본을 선진국이라 부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이제는 선교의 리더국가라고 자부하는 한국에서 선교대상국으로 분류하는 일본이 정작 정직과 윤리에서는 우리보다 앞선 평가를 받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씁쓸한 현실이다.
나는 감히 한국의 교회에서 언어가 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비록 평신도이지만 이것을 오랬동안 묵상하며 생각해왔다. 혹 이 글로 인해서 교계에서 야단맞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습관화된 언어는 우리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한다. 따라서 올바를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우리의 의식세계에도 매우 중요하다. 지금까지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라 ‘드리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또는 극존칭으로 ‘올린다’ 또는 ‘올려드린다’라는 표현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요즈음 많이 드는 생각이 ‘드린다’ 또는 ‘올린다’는 표현들이 정말 예배의 올바른 표현인지는 잘 모르겠다. 내 생각에는 예배는 삶으로 진리를 살아 가겠다는 의미의 ‘예배한다’가 더 올바른 표현이 아닌가 생각된다. 원어는 잘 모르지만 영어로 예배하자는 worship은 행동을 뜻하는 동사이다. 따라서 ‘예배한다’로 번역된다. 여기서 “예배”는 드려지는 명사가 아니다. 예배는 물질로 ‘드리는’ 것뿐 아니라 몸으로도 살아내야 하는 행동인 것이다.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린다는 행위 자체는 사실 매우 쉽다. 예배도 습관이 되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그러나 세상에 나가서 세상과 다른 가치관을 추구하며 삶에서 진리를 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정말 대단히 고독하고 어려운 싸움이다. 우리는 쉬운 것은 잘 하면서 어려운 것은 되도록 피하려 한다.
오래된 한국성경 번역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라는 불명확한 성경번역으로 진리를 오도했다. 여기서 “진정”이라고 잘못된 번역의 단어는 정성을 다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아직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마음을 모아서 정성을 다하는 것이 진실된 예배로 안다. 그러나 올바른 번역은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하라 worship in Spirit and the truth” 이다. 흔히 생각하는 ‘정성을 다해서’ 예배 드리라는 의미와는 매우 거리가 멀다. 진리를 깨닫고 진리를 삶으로 살아내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지만 습관화된 언어는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지배한다. 진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것 만으로는 예배가 예배되지 못한다. ‘진정’이 아니라 ‘진리’로 언어가 바뀌어야 진리를 생각하고 진리에 거하는 행동이 나온다.
‘드린다’ 또는 ‘올린다’ 라는 표현에는 드린 것으로 내가 할 바를 다했다는 의미를 은연중에 내포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우선이 되다 보니 변질되어 물질을 많이 드리는 것으로 예배의 질을 평가한다. 그러나 삶에서 어떻게 치열하게 진리를 살아내는가로 예배의 질이 평가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드리는 예배는 물질과 정성을 많이 드리고는 만족해서 돌아서서는 진리에 대한 고민 없이 세상순리대로 행동하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 아닌지? 한국의 교회처럼 물질을 잘 드리는 교회는 찾아보기 힘들다. 많이 드리는 한국교인들로 인해서 한국교회는 물질이 넘쳐난다. 그래서 한국에는 부자교회들이 참 많다.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교인들도 참 많다. 아는 것들도 많다. 그러나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는 면에서는 한국교회처럼 연약한 교회가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은 이러한 드리기만 하는 예배를 식상 하다고 그만두라고 하신다. 삶에서 진리를 살아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씀하신다. 심지어는 하나님은 헛되이 불사르는 예배가 싫다고 너희 중에 누가 제발 성전 문을 좀 닫았으면 좋겠다고까지 표현 하신다. 말라기서 이다. 여호와의 기뻐하는 제사는 풍부한 제물이 아니라 마음의 정직함이라 하신다. 아모스에서 하나님은 번제나 소제를 받지 않으시겠다며 거슬리는 노래소리도 그치라 하신다.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하수같이 흐르게 하는 것에 먼저 집중하라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전에서 ‘드리는 예배’ 보다는 세상에서 진리와 공의를 몸으로 실천하는 ‘행하는 예배’를 먼저 요구하시는 것이다.
이제는 우리 기독교인들부터 작은 일부터 정직하고 성실하게 진리대로 살아내는 일에 힘써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누가 보건 안 보건 해야 하는 업무는 성실하고 정직하게 행하고, 법으로 정해진 것은 내게 손해가 되어도 지켜내고, 규정에 돌아가라 하면 이유를 묻지 말고 돌아가고, 올바를 추를 가지고 정확하게 무게를 재고, 내야 하는 세금은 정확하게 내고, 허용이 안 되는 것은 목에 칼이 들어와도 안 된다고 외치는 쉽지 않은 싸움을 이제는 우리모두 치열하게 싸워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 한국기독교인들이 해야 할 예배이다. 기독교인들끼리 교회에 모여서 감격스럽게 예배하는 것도 물론 필요하지만 흩어져서 삶 속에서 치열하게 진리대로 각각 올바르게 삶을 살아내며 공의를 강물같이 흐르게 하는 것이 사회를 변화시킨다. 물론 이렇게 글을 쓰는 나도 이러한 지적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따라서 내게도 다짐하듯이 이 글을 쓴다. 이러한 기본이 세월호로 희생된 수많은 영혼들에게 빚을 진 우리 기성세대 모두가 우선적으로 힘써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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