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일랏은 홍해가 시내반도를 두고서 Y자로 갈라진 동쪽홍해의 아카바 걸프(Aquava Gulf) 끝부분 항구이다. 서쪽홍해인 수에즈 걸프(Suez Gulf)는 수에즈운하(Suez Canal)를 통해 지중해로 연결된다. 홍해(Red Sea) 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홍해는 시내반도와 아리비아 반도의 붉은 사암을 깍아 흘러내린 물로 이루어진 바다이다. 에일랏은 이스라엘에서 유일하게 홍해로 연결되어 아시아로 교역을 할 수 있는 이스라엘 제2의 항구도시이다. 이곳에 이스라엘의 국경은 매우 좁다. 옆에 요르단의 항구도시인 아카바(Aquava)와 홍해 끝자락에 바로 붙어있기 때문이다. 국경이 두개의 도시를 갈라 놓았지 예전에는 하나의 항구나 마찬가지였다. 아카바는 내륙지방인 요르단의 유일한 항구도시이다. 고대 아카바 항구에서 요르단을 남북으로 종단하여 시리아까지 북상하는 ‘왕의 대로’는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무역로였다. 이 왕의 대로상에 ‘페트라’가 위치한다. 에일랏의 서편인 시내반도는 이집트 영토이다. 홍해 연안을 따라서 이집트에서 이스라엘과 요르단을 지나서 사우디아라비아 반도까지 국경만 없으면 한시간이면 차로 4개국을 다 통과할 것 같았다. 에일랏 항구에서 홍해 쪽을 바라보면 이웃한 4개국이 한눈에 다 보였다.
요르단은 인구 650만명의 중동의 작은 입헌군주국이다. 예전 성경상의 모압과 에돔의 후예들이 지금의 요르단국민들 이리라. 한반도의 남한 면적보다 약간 작은 크기에 동으로는 이라크, 서로는 이스라엘과 이집트, 북으로는 시리아, 남으로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중동의 강국들에 둘러싸여 있다. 주변국들은 석유가 많이 나지만 요르단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석유 한 방울 나지 않는다. 무슬림 형제국가들인 중동국가 들로부터 외면당할 수도 없고, 정치·외교는 물론 경제협력이 절실히 필요한 미국과 관광연계 수입원인 이스라엘과의 관계도 소홀히 할 수 도 없는 상황이다. 요르단은 예루살렘과 연계하여 많은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있어 관광수입에 크게 기여하고 있으며 중동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비교적 자유로운 왕래도 가능하다. 요르단에는 매년 자국민의 숫자보다 많은 약 700만명 이상의 관광객이 찾아와 30억 달러 이상을 쓰고 가는데 이중에서도 페트라가 단연 최고의 관광 상품이다. ‘페트라’ 관광객들이 현재의 가난한 요르단을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것이다. 석유도 없는 요르단 땅에 관광지 ‘페트라’마저 없었으면 어찌 했을까?
에일랏 공항에서 모인 우리 투어팀은 은퇴한 미국인부부, 캐나다인 부부, 그리고 호주에서 6개월간 장기휴가를 내고 혼자서 세계 7대 불가사의를 보러 다닌다는 엔지니어, 그리고 나까지 6명이었다. 나와 호주에서 온 엔지니어 ‘아놀드’와는 급속히 친구가 되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은 투어에서 고용된 운전수였다. 공항에서 차로 10분을 달리니 요르단 국경 입국장이 나왔다. 그런데 이 입국장에서 두 시간을 지체한다. 이스라엘에서 요르단으로 입국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페트라를 다녀오는 입국비자를 받는데 비용이 80불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한 시간을 줄 서서 복잡한 출국절차를 끝내고 200여미터를 걸어서 요르단에 입국장에 도착하니 또 한번 줄을 서서 한 시간을 기다려서 입국절차를 거쳐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비로서 요르단인 투어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젊은 친구인데 요르단에서 한번도 해외에 나가본 적도 없이 현지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라는데 영어를 참 잘했다. 물론 외국인 상대로 가이드로 일을 하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하겠지만 요르단에서만 아랍어로 교육을 받은 현지인 치고는 영어표현이 매우 유창했다. 필요는 노력의 어머니라고 했던가? 먹고 살기 위한 노력이 눈물겹다. 갑자기 전체 투어그룹이 30명으로 불어났다. 그리고 우리는 대형버스에 올랐다. 고맙게도 나의 자리는 버스 밖이 훤히 내다보이는 운전사 옆자리였다.
홍해로 땅끝을 마감하는 요르단에서 ‘아카바’는 북상 길의 시작점이다. 여기서 왕의 대로가 시작해 요르단을 종단한 뒤 암만으로 연결되거나 또는 지중해 항구들로 연결된다. 왕의 대로는 해발 0m에서 800m에 이르기까지 급격하게 고도를 높인다. 차를 타고 고속도로를 오르는 귀는 순식간에 먹먹해진다. 3천4백년전 가나안을 향하는 이스라엘 민족은 에일랏에서 에돔이 있는 페트라를 우회해서 아라바(Arava) 사막길을 조금씩 힘겹게 올랐을 것이다. ‘아라바’는 ‘거친길’ 이라는 뜻이라 한다. 광야의 한복판에서 불끈불끈 솟은 붉은 사암 산맥이 지평선을 가린다. 이곳의 사암(sandstone)은 해의 방향을 따라 빛을 변화하면서 때로 붉고, 때로는 황토색이다. 그 풍경은 무척이나 위압적이다. 대체로 바위산은 유려한 곡선으로 이어지나 어떤 바위산은 불현듯 솟아올라 길을 막는다. 가까운 산은 붉은색이 뚜렷하되, 멀수록 자욱한 모래먼지에 색을 잃어 회색으로 풍경을 수놓는다. 끝없이 병풍처럼 펼쳐지는 산악지대와 그 사이 사이가 광야이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이 뜨거운 태양만이 작렬했다. 주변에 보이는 모든 것이 광야(wilderness)이다. 아니 다른 말로 하면 사막(desert)이다.
3천4백년전 모세와 함께 출애굽한 이스라엘 민족이 가데스 바네아 사건 이후에 38년간 이 근방의 광야를 헤맸으리라고 추측된다. 이스라엘 민족이 시내반도를 지나서 에일랏(Eilat)을 거쳐 요단강 동편인 모압으로 올라가는 길에 에돔 땅(지금의 페트라)을 지나서 북상하려다가 지나감을 허락하지 않는 에돔과 전쟁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동편광야로 우회했다는 표현이 나온다. 페트라로 향하는 계곡 이름은 ‘와디 무사(Wadi Musa)’, 번역하면 ‘모세의 계곡'이다. 그 계곡 끝엔 ‘아인 무사(Ain Musa)’, '모세의 샘'이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갈증을 호소할 때 모세가 바위를 쳐 물을 솟게 한 곳이라 전해진다. 버스를 타고 페트라에 올라가는 두 시간 동안 좌우를 바라보면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으로 돌아가 보았다. 이러한 삭막한 광야 같은 환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수시로 불평을 해 댄 것도 무리가 아니다 싶었다.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런 악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 이곳에는 파종할 곳이 없고 무화과도 없고 포도도 없고 석류도 없고 마실 물도 없도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아직도 귀에 들리는 듯 하다. 호르 산 정상에 ‘아론’의 무덤이 있다고 가이드가 손가락으로 가르킨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다.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 민족을 이끈 대제사장 ‘아론’은 여기서 숨을 거뒀다. 민수기는 이렇게 기록했다. "아론은 그 열조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에서 내 말을 거역한 연고니라." '므리바 물'이 바로 지금의 ‘아인 무사’ 샘물이라고 한다. 모세도 “내가 너희를 위하여 물을 내랴!” 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혈기를 내면서 바위를 두 번 내리쳐 자신의 능력으로 변질시킨 대가로 역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느보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결국은 출애굽 한 200만명이 넘는 이스라엘 백성 중 25세가 넘은 성인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 제외하고는 모두 이 황량한 광야에 뼈를 묻는다. 불신앙, 불순종의 결과이다.
드디어 페트라에 도착하였다. 가이드가 그룹을 셋으로 나눈다. 하루 투어로 저녁에 아카바로 돌아가는 그릅, 1박2일 투어로 저녁에 ‘와디무사’의 베드윈(광야를 터전으로 생활하는 사람들) 텐트에서 1박하는 그릅, 그리고 페트라에서 1박2일의 그릅이다. 나는 호주에서 온 ‘아놀드’와 같이 페트라에서 1박2일의 그릅이다. 페트라의 입장료가 하루 50디람, 이틀이면 60디람이기 때문에 입장료 구분을 위해서이다. 이틀 입장표에는 이름이 넣어진다. 다음날 재 입장할 때 여권과 함께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선조들이 만들어 놓은 유적지의 단순 입장료 치고는 무척 비쌌다. 디람을 미화로 환산하면 하루 입장료가 한 사람에 75불인 셈이다(입국비자와 페트라 입장료등 총 155불이 요르단 정부의 주머니로 들어간다). 페트라는 요르단이 세계에 자랑하는 국보 1호의 역사적 유적이다. 이집트의 피라미드, 인도의 타지마할 등도 가 보았지만, 선조의 유물을 이렇게 비싸게 팔아먹는 나라는 처음 보았다. 그렇다고 여기까지 페트라를 보러 와서 입장료 비싸다고 안 들어갈 수는 없다. 요르단 정부는 그것을 노린 것이리라. 물론 가난한 현지인들에게는 입장료가 없다. 그러나 현지인과 여행객들은 복장과 생김새에서 너무 차이가 난다. 여행지에서 항상 여행객들을 짜증나게 하는 것은 필요이상의 호객행위로 여행객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현지 장사꾼들이다. 페트라도 무리가 아니다. 곳곳에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입장표를 구입하고 매표소를 지나자 마자 입장료에 포함되었다고 말을 타고 가라는 베드윈들이 나타난다. 매표소에서부터 2km는 걸어가야 협곡이 시작되기에 거기까지 말을 타고 가라는 설명이다. 모래 먼지도 일고 햇빛도 뜨거워 순간 갈등이 일어난다. 그런데 일시 관심을 보이니 자기들끼리 서로 태워주겠다고 싸운다. 그래서 호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포기했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릴 때 엄청난 팁을 요구하면서 애를 먹인다고 한다. 협곡 입구에도, 템플 앞에도 옛 로마군병(페트라에 왠 로마군병??) 복장을 한 베드윈들이 창을 들고 서 있다가 여행객들이 사진을 찍으면 돈을 달라고 손을 내민다. 템플에서 협곡입구까지 돈을 받고서 태워주는 마차가 있다. 걷기를 힘들어하는 노인들은 마차를 타고서 되돌아간다.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따라온 현지상인들이 불쑥불쑥 관광품들을 내어 밀고 가격을 외친다. 템플 앞에 있는 간이식 카페에서 커피를 한잔 마셨더니 뜨거운 물에 인스턴트 커피를 타서는 한잔에 3불을 요구한다. 이들에게는 여행객들이 호구이다.
매표소로부터 한 2km를 걸어가면 붉은 사암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바위 틈새의 좁고 깊은 골짜기가 나타난다. 페트라 옛 도시로 들어가는 입구는 이곳 단 한곳뿐이다. 뒤쪽으로도 가파른 산들로 둘러 쌓여있어 우회할 방법이 없다. 정말 난공불락의 요새이다. 깎아지른 듯한 100여미터 높이의 절벽에 폭이 5미터 정도의 입구만 철저히 봉쇄하면 페트라 내부로 들어 갈 방법이 없다. 페트라 협곡의 높이는 한 100여미터는 되어 보여서 꼭대기가 안 보인다. 걸어 들어가다 보면 구불 구불 갑자기 폭이 6미터도 안되게 좁아졌다가 다시 15미터 정도로 넓어 지기도 한다. 앞으로 나아가는 길의 풍경은 태양이 비집고 들어오는 각도를 따라 모습과 색을 달리한다. 그러한 풍경을 따라 위를 쳐다 보느라 목이 아프다. 한 컷, 한 컷 계속 카메라를 눌러대어도 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난다. 방해 받지 않고 자유스럽게 천천히 협곡을 걸으면서 한걸음씩의 보폭을 즐기고 싶다. 그런데 템플서부터 협곡입구까지 돈을 받고서 여행객을 실어 나르는 마차(chariot)가 속력을 줄이지 않고서 걷는 사람들 옆을 빠른 속도로 달리기에 멀리서 협곡을 따라서 들려오는 말발굽소리에 계속 신경을 곤두세워야 한다. 지나치는 베드윈 마부는 신나서 말에 채찍질을 해 대고 마차에 탄 여행객들은 눈이 휘둥그래서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댄다. 마치 인디애나 죤스 영화의 한 장면을 재연하려는 듯 하다. 협곡 경치에만 한눈 팔다가는 지나치는 마차에 다치기 쉽다. 좁은 협곡에서 양쪽에서 계속해서 나타나는 마차들은 위협적이다. 꼬우면 돈내고 타라는 것인가? 요르단 정부는 왜 이런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적지에 위험한 마차를 허용하는지 잘 이해가 안되어 매우 짜증스럽다.
협곡 좌우로 3km 길을 가는 동안 협곡의 좌우로 2천년이 넘은 세월을 견디어내고 일부는 부서졌어도 여전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바위를 파낸 물 도랑이 양쪽으로 계속해서 끊어졌다 이어졌다 반복한다. 영어로 하면 Aqua-duct아쿠아턱트 이다. 옛 로마도 Aqua-duct 를 통해서 도시에 물을 공급받았다지만 기원전에 사막기후의 도시에 세워진 페트라에 이러한 아쿠아덕트를 발견하리라고는 충격이었다. 절벽의 위쪽에서 가끔씩 내리는 비와 이슬이 절벽을 타고 내려와서는 이 도랑을 타고서 페트라 안으로 흘러 들어가서 저수지에 저장되는 원리였다. 따라서 입구에서부터 템플 광장까지 3km거리를 계속해서 바닥의 높이가 조금씩 낮아져야만 물이 낙차를 따라 광장까지 도달한다. 이런 것을 보면 옛 사람들이 참으로 지혜롭다. 그런데 양쪽 두 개의 아쿠아덕트 높이가 달랐다. 가이드가 설명하기를 높은 것은 사람이 마시는 물이고 낮은 것은 말이나 염소, 낙타 등 동물들이 마시는 물이라는 것이다. 어떻게 광야 같은 산속에서 3만여명의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면서 살았는지가 이러한 아쿠아덕트(aqua-duct)와 저수지로 설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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