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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번째 이스라엘 방문기 5

      날짜 : 2013.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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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루살렘 성전은 지난 1월에 이틀에 걸쳐서 성내 구석 구석을 돌았기에 그리 새로울 것은 없었다. 그러나 특이한 점은 이번에는 예루살렘이 내려다 보이는 감람산 정상에서나 예루살렘 성 안에서나 너무 관광객들이 많아서 꾸역꾸역 사람들에 치인 기억만 난다. 예루살렘 성내의 좁은 길들을 지나다니기도 힘들 정도였다. 여행 성수기에 사람 구경만 싫건 한 셈이다. 그런 와중에도 이번에 몇 가지를 확인하고 살핀 것들이 있다.  지난2월에 신문에 실린 이스라엘 방문기에골고다 언덕이 성안에 있다는 것은 성경의 내용과는 틀리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무덤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내부에 위치한 골고다(Golgotha)언덕이 언덕으로서 높이가 너무 낮다. 따라서 구교가 주장하는 성무덤교회 내부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이라기 보다는 성 밖에 새로 발견되었다는 또 다른 골고다 언덕이 더 설득력이 있다라고 어줍잖은 주장을 펼친 나의 글을 읽으신 분 중에 휴스턴 서울교회 이수관 목사님이 당시 내게 친히 메일을 보내주셨다. 우선은 2000년 당시의 예루살렘 성전은 성벽이 증축이 되어서 현재 예루살렘 성전은 과거 성밖의 장소가 이제는 성내로 들어왔다는 것과 점령자에 의해 파괴되고 잔해 위에 재건되는 옛 도시들은 계속해서 바닥의 높이가 올라간다는 것을 알려 주셨다. 2천년 전의 예루살렘 성벽의 위치를 책을 찾아서 확인하니 현재 성안에 있는 성무덤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의 위치가 당시는 성 밖이었던 것이 확인 되었다. 또 내가 간과한 것이 예전의 성들이 점령자에 의하여 파괴되고 폐허 위에 다시 재건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높이가 계속하여 높아만 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의 예루살렘 성의 표면 높이는 2천년 당시에는 현재보다 10미터는 파 내려가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판단하고 결론 내는 나의 안목이 얼마나 미숙했던가? 공부가 많이 부족함을 느꼈다. 성무덤교회 장소는 콘스탄티누스 당시에 로마카톨릭 교회에서 만들어낸 허구라던 나의 섣부른 주장에 사과를 드린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현재 서로 주장하는 두 개의 골고다언덕 중 어느 것이 맞는 것인가는 여전히 판단을 유보하겠다.


        이번에 가서 관심을 가지고 확인 한 바로는 예루살렘 서쪽 성전 벽이 현재의 높이에서 흙을 파내려 가면 12미터나 내려가서 바닥에 돌로 깐 옛길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번에 안 것인데 통곡의 벽에 가면 유리로 밑을 내려다 보이게 해 놓은 곳이 있다. 그 구간만 옛 성전 벽이 얼마나 더 내려가는가를 파내려 가서 보여준 곳이다. 불행히도 통곡의 벽을 찾아간 날이 토요일 유대인들의 안식일이었기에 사진을 찍는 것을 철저히 단속하기에 아쉽게도 사진을 찍지는 못했다. 그러나 12미터나 더 파내려 가야 헤롯 성전의 바닥이 드러난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 하였디. 그리고 통곡의 벽을 한 50미터 남쪽으로 벗어나서 사진을 찍었다. 그곳에서는 옛 성전 바닥에 드러난 돌길까지 파 내려간 잔해들이 드러난 곳이 있었다. 그곳에서는 사진을 못 찍게 막는 사람이 없었다. 한 가지만은 확실하였다. 2천년전 예루살렘의 모습은 땅밑에 깔려서 우리가 이제는 영원히 볼 수 없다는 것을


        예루살렘 크리스찬 쿼터의 한 음식점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서 투어그릅에서 베들레헴에 가는 사람들만을 따로 추려서 베들레헴(Bethlehem)으로 출발하였다. 베들레헴은 이제는 우리가 흔히 부르는 크리스마스 케롤 가사에서 더 많이 알려진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지이다. “오 베들레헴 작은골, 너 잠들~었느냐~. 별들만 높이 빛나고 잠잠히 있~으니~” 이제까지 숫하게 노래로만 불러오며 머리로만 상상해온 베들레헴을 이제는 눈으로 직접 보러 가는 것이다. 어려서 보아오거나 참여했던 수많은 크리스마스 성극에서 배경이 되었던 베들레헴과 그 주변 들판을 보러 가는 것이다.  베들레헴은 ‘Beth-’, ‘Lehem’- 빵 등 두개의 히브리어 단어를 합친 합성어이다. 말하자면 빵집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의 룻기에 이곳에 보아스의 밀밭과 타작마당이 있었다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이곳이 유명한 밀의 생산지이고 이곳에서 생산되는 밀이 양식으로 예루살렘등에 제공이 되었던 때문에 빵집이란 이름이 붙지 않았겠는가 생각된다. 마치 미국에서도 밀밭이 몰려있는 중부지역을 bread basket states라고 부르는 것처럼


        오전 내 같이한 투어가이드는 메인 그릅과 같이 예루살렘에 남아있고 우리 그룹은 영어가 서투른 운전수와 함께했다.  그러나 한참을 달려야 하겠다고 각오한 것이 싱거울 정도로 욥바 게이트에서 떠나자 15분만에 바로 베들레헴 체크포인트에 도착했다. 나중에 알았지만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은 불과 10km 거리로 바로 붙어있다. 예전에나 두 개의 별도의 성읍이었지 지금은 하나의 같은 도시라고 봐도 된다. 그러나 베들레헴 남쪽과 서쪽은 높은 벽으로 막혀서 경계가 뚜렷하다. 먼저도 언급했듯이 베들레헴은 이제는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인 서안지구 내에 위치해 있다. 따라서 체크포인트를 거쳐서야 높은 벽으로 막아놓은 자치구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체크포인트에서 경비는 이스라엘 군인들이 서고 서안지구 자치구 내에서의 치안은 팔레스타인 경찰들이 담당한다고 한다. 어떤 때는 군인들이 버스 안에까지 들어와서 일일이 여권검사를 한다기에 여권도 준비했더니 그냥 무사통과다. 일단 서안지구에 들어가니 또 다른 세계가 펼쳐졌다. 길은 좁고 옛 길을 살려서 그런지 구불구불했다. 확실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이 사는 곳은 이스라엘 인들이 사는 곳보다 경제적으로 열악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사는 모습이 꾀쬐쬐하고 우중충했다.


        체크 포인트 후에 합류한 투어 가이드도 팔레스타인 현지인으로 바뀌었다. 팔레스타인 현지인 투어가이드는 서안지구 자치구 밖으로는 나가지 못하기에 베들레헴 투어만 담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팔레스타인 투어가이드가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영어도 유창하게 잘 했지만 그룹 내에 프랑스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프랑스어를, 이태리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이태리어를, 그리고 스페인에서 온 사람들에게는 스페인어를 하는 것이었다. 버스에 탄 모든 사람들의 언어 중 나의 언어인 한국어만 못했다. 왜 한국어만 못하느냐고 농담으로 내가 투덜댔다. 독일어와 모국어인 아랍어까지 모두 6개국어를 한다고 했다. 정말 언어에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다. 어떻게 팔레스타인 자치구 내에서 밖으로는 나가지도 못하는 사람이 6개 언어에 이렇게 많은 은사를 받았는지 놀라웠고 무척 부러웠다. Palestine-팔레스타인은 한글 성경에서는 블레셋으로 불린다. 지금의 Palestine이 가나안시대의 블레셋과 지명과 족속이름이 같다. 당시의 지중해 연안의 블레셋 족속이 지금의 팔레스타인인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스토리인 다윗이 결투를 벌인 7척장신 골리앗블레셋=팔레스타인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팔레스타인 사람들 중에도 재주꾼들이 많은가 보다. 어려운 가운데 언어에 이렇게 뛰어난 사람을 보게 되다니.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충분한 자격이 있는 사람들인데 이렇게 정치적인 이유로 서안지구 자치구내에 갇혀서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고통 받는다고 생각된다.   


        주변을 둘러 보았다. 이곳이 다윗이 태어나서 자란 고향이다. 그리고 혈통으로 다윗의 후손인 예수가 태어난 마굿간이 있던 곳이다. 그 마굿간 위에 세워진 예수 출생교회를 보러 가는 것이다.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마굿간이 있던 곳에 세워진 교회라는 곳에는 큰 관심이 없었다. 그곳이 정말 2천년전 예수가 출생한 마구간 이었다라는 증거도 없거니와 옛 모습도 전혀 남아있지 않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윗을 기념하는 교회도 있다는데 가 보지 못했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로마 카톨릭교가 도처에 기념으로 세워놓은 교회건축물들은 비슷비슷했다. 예수 출생지라는 곳에도 가 보기 전부터 의미 없는 교회건물만을 보고 올 것이라는 것은 미리 알았다. 다만 모압에서 시어머니 나오미와 함께 죽은 남편의 고향으로 돌아온 모압여인 룻(Ruth)이 보아스에게 은혜를 받은 밀밭과 타작마당이 베들레헴에 있었고, 이새의 아들 다윗이 들에서 양을 치면서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시편을 노래했던 베들레헴 주변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 시간을 낸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서 다윗이 목자로서 활동했던 같은 공간, 롯이 이삭을 줍던 밀밭, 요셉이 마리아와 함께 인구조사에 응하려 들렀던 베들레헴을 시차를 초월한 같은 공간을 경험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동방박사들이 별을 따라서 예루살렘에 들어서 헤롯왕을 만난 뒤에 여전히 별을 따라서 10여 킬로미터를 걸어서 이곳까지 와서 아기예수를 경배 했겠지? 그 같은 길을 2천년후 지금의 내가 탄 버스가 따라 온 것이겠지? 목자들이 별빛을 보고서 베들레헴까지 와서 탄생한 아기예수에게 경배를 했겠지? 그런데 사실 별이 서치라잇(search light)과 같이 가는 길을 비추어주지 않는다면 10km의 거리에서 밤하늘에 보이는 별빛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의 탄생을 안내하는 별빛이 베들레헴 위에 머물렀다면 불과 10km 떨어진 예루살렘에서도 뚜렷이 보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옛일을 알 수 없는 나는 당시의 목자들과 동방박사들을 안내한 별빛이 어떻게 길 안내를 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동방박사들이 성경의 예언대로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베들레헴으로 왔던 것이 아닐까? 멀리 언덕이 보였다. 저곳이 보아스의 밀밭이 있던 곳일까? 나오미와 룻이 저 동편의 산을 넘어서 귀향을 했겠지? 저 들을 넘어서 그 뒤에 있는 산이 다윗이 젊은 목자인 시절에 양을 치던 언덕들이었겠지. 그곳까지 이제는 제법 많은 집들이 들어섰기에 예전 같은 밀밭과 양치는 언덕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러나 밀 밭과 양을 몰고 다니기에 알맞은 언덕의 모습들은 지금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언덕 중턱의 길거리에는 좁고 구불거리는 길에 수많은 버스들과 차량이 뒤엉켜서 앞으로 나아가지를 못해서 짜증스러웠다. 걷는 것보다 더 느리게 힘들게 앞으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 동안 우리는 가이드의 베들레헴에 얽힌 얘기들을 듣고.. 가이드에 의하면 서안지구의 팔레스타인 인구는 250만인데 80%는 무슬림이고 20%는 크리스찬이라고 한다. 20%의 크리스찬이면 50만명의 인구이다. 그러나 대부분 로마 카톨릭이나 그리스 정교회 교인들이다. 이곳 베들레헴에도 알마니언들이 살고 있고 알마니언 교회도 있다. 오즈만 터키의 알마니언 말살정책을 피해서 성지에 와서 살고 있는 알마니언들이 예루살렘만 아니라 베들레헴에도 정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복을 입은 팔레스타인 학생들이 하교를 하는 모습들이 보였다. 이곳에서는 토요일에도 학교를 가느냐고 물었더니 금요일은 아랍의 안식일이라서 휴일이고 일요일은 크리스찬의 주일이어서 휴일이기에 팔레스타인은 금요일에도 쉬고 일요일에도 쉰다는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의 토요일은 앞뒤로 휴일에 낀 일하고 학교 가는 보통 날이다. 이곳은 로마 카톨릭이나 신교는 1225, 그리스 정교회는 16일 그리고 알마니언은 118일이 크리스마스라고 한다. 일년에 3번이나 예수 탄생교회에서 성대한 크리스마스 축제가 벌어진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1225일이 예수가 탄생한 생일이라는 근거도 희박하다. 크리스마스가 교파에 따라서 기념하는 날이 달라서 정확한 날자의 의미가 없어졌듯이 예수탄생교회의 장소도 내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예수탄생교회(Church of the Nativity)에 도착했다. 이 교회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만든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가 성지순례를 하면서 세운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이곳은 한 건물에 세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로마카톨릭 교회,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알마니언 교회이다.  그러나 교회 입구에 정문이 없었다. 밑에 몸만 지나갈 조그만 구멍만 남기고 전체 벽을 돌로 막아 놓았다. 이 구멍은 허리를 구부리고 들어가야 하게 좁고 낮았다. 예수의 탄생지를 낮은 마음으로 구부리고 들어가라는 의미라고 한다. 아니 이슬람이 지배할 때 이슬람군이 말을 타고서 성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좁은 입구만 제외하고 벽을 막아 버린 것이라 한다.  그러나 들어간 교회 안에는 예수가 탄생한 마구간 이었다는 곳을 보려고 줄 서서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앞에 천 여명은 되어 보였다. 같이 온 일행이 그 줄 뒤에서 참배(?)하려고 기다리는 한 시간 반 동안 나는 그 긴 줄에 서기를 포기하고 일행을 벗어나서 교회 주변의 베들레헴 거리를 걸으며 베들레헴의 공기를 들이 마실 수 있었다. 혹 일행을 놓칠까 봐 염려 되기도 했고 또 팔레스타인 경찰에게 검문을 당할까 봐서 교회 주변을 멀리 못 벗어나고 걸으며 사색에 잠겼다. 요셉과 출산을 앞두고 배부른 마리아가 나사렛으로부터 100km가 넘는 저 북쪽 예루살렘 뒷 편 길을 (아니면 산길을 피해 요단강변을 따라서 남쪽으로 내려와서 사해 쪽에서 서쪽으로 올라온 저 동쪽 산일까?) 마리아가 탄 나귀를 끌고서 요셉은 힘들게 걸어서 이곳 베들레헴에 도착하니 발은 부르트고 다리는 아픈데 두 사람 들어가 쉴 방이 없어서 이곳 저곳에 빈방을 물으면서 안타깝게 헤매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거기에 배가 불러서 해산을 앞두고 진통이 시작된 마리아가 들어가 누울 방이 없었다.  내가 이곳 베들레헴에서 묶을 곳이 없어 누추하고 냄새 나고 축축한 마굿간에서 말들 옆에 여장을 푼다면 얼마나 비참해 할까? 그런데 열악한 당시에야 두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그래도 힘들게 마구간에서 아기예수를 출산하고 별을 따라 찾아온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에 둘러싸여서 경배를 받으며 얼마나 기뻐했을까?  나중에 그곳을 참배하고 나온 일행의 사진을 보니 예상했던 대로 의미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두 후세 교회가 만들어 놓은 중세교회의 기념물들이다. 베들레헴 투어의 내용이 이렇게 싱거웠다고 미리 알았다면 아까운 시간을 기다리는 일에 허비하지 않았을 텐데


        예루살렘을 거쳐서 다시 짐을 맡겨놓은 텔아비브의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옛 에돔과 모압의 땅인 요르단으로 떠나기 위해서이다.  – (요르단으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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