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해는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이다. 해발 마이너스 400미터. 요단강에서 물이 들어와서 고이기만 하고 빠지는 곳이 없어 소금의 농도가 일반 바닷물의 7배라고 한다. 이곳 해발 마이너스 400미터는 기압이 낮아서 100도 밑에서도 물이 끓는다고 한다. 사실 그냥 눈으로만 볼 때는 해발보다 더 아래쪽인 지구상에서 가장 낮은 곳 이라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크기는 1월에 보았던 갈릴리 바다보다 많이 크다. 남북으로는 끝이 안 보인다. 그저 뜨거운 사막의 땅에 있는 죽은
호수였다. 주변도 풀 한포기 없어서
황량하였다. 물이 염도가 너무 높아서 주변에 식물을 못 자라게 하는 것이다. 요압이 설명하기를 사해가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영어로 “Dead Sea is now dying” 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내가 “How could dead be dying
again?”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저도 우스운지 피식 웃는다. 지금도 사해는 매년 1미터씩 높이가 낮아진다고 한다. 요단강을 통해서 들어오는 물의 양이 매년 줄어서 사해의 높이가 1미터씩
낮아지기에 그대로 두면 몇백년 후에는 말라버린 소금사막을 보게 될 것이라 한다. 따라서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공동으로 홍해에서 파이프로 물을 끌어오는 안을 심각하게 논의하고 있다고 한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가 속력을
줄였다. 투어가이드인 요압이 오른편 산중턱을 가르친다. 저곳이
성경의 사해사본이 발견된 쿰란(Qmlan) 동굴이란다. 여기에서 1947년에 양을 치던 한 베드윈이 양을 잃어버리고 찾다가 동굴에서 발견한 항아리 안에 있던 양가죽 두루마리였단다. 양치기가 잃은 동물을 찾기 위하여 돌멩이를 동굴로 던졌는데 항아리 깨지는 소리가 나서 동굴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에서 오래된 항아리에 들어있는, 면에 싸여 있는 양피지 두루마리를 발견했다는 것이다. 이 두루마리들은 베드윈이 베들레헴에 가지고 들어왔으며, 성전에서
훔쳤다는 의혹 때문에 골동품 상인에게 넘어갔다. 그는 곧 이 문서의 정체를 문의하기 위해 성경학자들을
접촉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이것이 성경의 사본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그것도 현존하는 가장 완전한 성경의
사본이라는 것이 밝혀진다. 사해 사본은 히브리어 성경을 포함한 900여편의
다양한 종교적인 문서들을 아우른다. 1947년에서 1956년경까지
사해 서쪽 둑에 있는 와디 쿰란 주변과 11개의 동굴들에서 발견되었다.
이들의 연대는 기원후 100년 이내로 올라가기 때문에 엄청난 종교적, 역사적 가치가 있다.
사해를 왼편으로 하고 조금을
더 달리자 ‘엔게디’(En Gedi) 라는 곳의 사인이 나타난다. 예로부터 사막의 오아시스라 불리던 엔게디이다. 석회석 벼랑 기슭의
온천에서 흘러나오는 물 때문에 습기가 늘 유지되고 있어 사막의 오아시스로 잘 알려져 있으며 쏟아져 내리는 폭포와 주변의 숲 등 자연 경관이 유명한
곳이라 한다. 헤롯왕의 은신처였던 맛사다도 이곳으로부터 물통을 나귀에 실어서 공급받았다 한다. 이곳에서 멀리서 보는 산기슭 주변에 들어가 쉴만한 동굴들도 있다. 한때
사울로부터 도피한 다윗의 은신처였던 이곳 엔게디는 주변의 사막과는 대조적으로 눈을 즐겁게 하는 오아시스로 인해 사해 바닷가에 위치한 명승지들 중
하나이다. 이 동굴은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왕을 피해 다윗이 숨었던 곳이다. 도망 다니던 다윗은 자신을 찾아 헤매다가 굴속에서 피곤해서 잠이 들은 사울 왕에게 다가가서 목숨을 취하는 대신
옷자락만을 살며시 베었던 바로 그 장소이다. 사막 같은 환경에서 도망 다니며 처절하게 목숨을 연명하던
고달픔을 쉽게 단번에 끝낼 수 있는 기회를 단호하게 사양했던 다윗의 위대함과 그 현장 주변의 황량함을 직접 보게 되니 새삼 다윗을 다시 평가하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도
팔레스타인 자치기구안에 위치해 있어서 이곳도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야 했다.
예루살렘부터 서지 않고
달린지 두어 시간이 지나서야 드디어 버스가 서서 들어간 곳이 AHAVA –라고 사해 미네랄이 풍부한
화장품을 파는 건물로 사해를 끼고 홀로 외롭게 서 있었다. 투어펙키지는 세계 어느 곳이나 똑 같았다. 기념품 가게나 특산품 가게 등 여행객들의 주머니를 노리는 상품 판매가 같이 결부되어 있다. 그러나 이건 좀 너무했다. 투어의 첫 스톱이 특산품 가게라니.. 사해는 윗쪽에서 물이 들어만 오고 나가는 곳은 없다. 따라서 사해물의
소금 농도가 바닷물의 7배인 것은 물론이고 포테시움을 비롯한 모든 미네랄의 보물창고이다. 피부병이 있는 사람들이 이곳 사해에 와서 하루에 몇 번씩 몸을 담그고 고침을 받은 후에 사해 밑바닥의 진흙이
곧 상품이 되었고 장사에 밝은 유대인들이 이것을 상품화하여 세계 각 곳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유명한
화장품이라는데 이곳에서 매우 저렴하게 판매한다고 한다. 나는 잘 몰라서 화장품 판매는 건너뛰고 그냥
밖에 전시되어 있는 소금기둥만 구경을 하였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도망하다 뒤를 돌아보고 소금기둥이 된
롯과 롯의 마누라가 저렇게 생겼을까 상상하며…
다음의 목적지는 맛사다이다. 이곳 맛사다는 원래 헤롯왕이 만든 바위산 고지위의 요새이다. 에돔의
후예로서 유대의 본분왕이었던 헤롯은 유별난 사람이었다. 헤롯은 마태복음 2장에 나오는 동방 박사와 예수의 탄생 이야기에서 2세미만 어린 아이를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유대왕이었던 그의 가문은 의외로 에돔 이었다. 에돔은 유대 남동쪽의 지역이며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은 쌍둥이 형 에서의 후손이다. 따라서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유대사람들은 출애급
당시 형제였던 사마리아인들도 경멸하는데 하물며 에돔 사람이랴. 따라서 헤롯의 출생은 유대 사람들이 헤롯을
싫어하는 원인이 되었다.
기독교인들이 헤롯을 잔인하고
광기어린 왕으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는 도시를 건설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유대의 경제적 기반
확충에 힘쓴 선견적인 통치자이기도 했다. 기원전 25년에는
유대 지방에 대가뭄으로 기근이 나자 이집트로부터 곡물을 수입하고 세금을 감면해 주기도 하였다. 헤롯은
자기 영토에 건축붐을 일으키고 많은 도시와 요새를 건설했다. 예루살렘에 수도시설을 정비하고 새로이 왕궁을
건설하고 국경에 마사다와 같은 요새를 새로이 정비하기도 했다. 그는 유대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던 예루살렘의
솔로몬 성전을 더 크고 화려하게 재건했는데 이것을 헤롯 성전이라고 부른다. 헤롯은 그 외에 다마섹, 안디옥 등에 수많은 건물을 지었고, 로마의 극장과 원형경기장을 짓는
등 수많은 건축물을 지었다. 성경에 기록은 없지만 유대인들은 헤롯을 유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부른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영광을 추구한 권력자였다..
헤롯의 가정사는 끊임없는
의심, 모함과 처형으로 얼룩졌다. 그는 여섯 번 결혼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사랑했던 부인 마리암을 죽였고 그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장모까지도 죽여 버렸다. 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고통 속에서 살았으며 정서적으로 불안해 했다. 후계자 문제를 두고 수차례
유언을 번복하기도 하고 결국, 왕위를 물려주려던 맏아들 안티파테르를 처형했다. 그는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취한 것을 지적하는 세례요한을 옥에서 목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서 헤로디아에게로
바쳤다. 사도행전의 기록대로 그는 고통 속에 죽었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한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는
말씀대로 역사가 요세프스에 의하면 그는 AD 4년 봄에 극심한 고통 속에서 충이 먹어 죽었다고 한다.
마사다(히브리어로 요새라는 뜻)는 이스라엘 남쪽, 유대사막 동쪽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 절벽에 자리잡은 고대의 왕궁이자 요새를 말한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마사다는 기원전 37년부터 31년 사이에 헤로데 대왕이 악정으로 인해 자기에 대항한 반란이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 피난 요새이자 왕궁으로
세웠다고 한다. 수천 명이 3 년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정도 분량의 식량을 쌓을 수 있는 식량창고와 3년간 견딜 수 있는 저수지도 만들었다.
AD
66년 유대-로마
전쟁이 발발하여 로마가 예루살렘을 침공한다. 일단의 유대인 저항군이 주둔하고 있던 로마수비대를 몰아내고 이 맛사다 요새를
차지했다. 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자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다른 유대인들과 그 가족이 맛사다로 피난해서
합류했으며 2년 동안 이곳을 근거지로 삼고 로마군을 대항했다. 72년
로마 제10군단이 마다사로 진격했다. 여러차례 요새를 공격했으나
성벽은 무너지지 않았고 이에 로마군은 서쪽의 고원과 같은 높이의 거대한 성채를 쌓아 올려 공성을 준비했다.
73년 드디어 공성을 위한 성채가 마련되자 로마군은 공성기를 이용해 성벽
일부를 깨뜨리고 요새로 진격해 들어갔다. 그러나 식량창고를 제외한 요새안의 모든 건물이 방화로 불에
탔고 엄청난 수의 자살한 시체들만 즐비했다. 유대인 율법은 유대인의 자살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기에
유대인들은 제비를 뽑아 서로를 죽였으며 최후에 2인이 남자 한 명이 죽이고 남은 한 명은 자살했다고
한다. 다른 건물을 모두 불에 태우면서도 식량창고만은 남긴 것은 최후까지 자신들이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자살한 것이지 식량이 없어서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이었다.
마사다는 1842년 그 존재가 알려졌고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이스라엘 고고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발굴되었다. 거의 2,000년 동안 이 요새가 사람의 손에 닿지 않았던 것은 그만큼 이 곳으로 올라가는 길이 험난하고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은 관광객의 트래킹을 위한 샛길이 나 있으며 따로 케이블카도 설치되었다. 헤로데 대왕의 두 개의 궁전과 빗물을 저장했던 거대한 수조, 로마식 목욕탕과 유대 반란군의 막사, 창고 등이 발굴되어 복원 되어있고 로마군이 요새를 둘러서 쌓았던 성채와 그 외곽에 로마군 막사의 유적도 발굴되어 있다. 이스라엘 국방군 장관이었던 모세 다이안은 이곳의 고대 신화를 이스라엘 국방군의 상징으로 보고 신병훈련을 마사다에서 끝마치게 했다. 부대에서 이곳까지 명예스러운 행진을 하며 밤에 이곳을 올라 "다시는 마사다가 함락되게 하지 않는다!"는 맹세를 하는 의식을 한다고 한다. 이스라엘 군의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의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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