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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번째 이스라엘 방문기 1

      날짜 : 2013. 12. 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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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두 번째 이스라엘 방문기

        지난 1월에 이스라엘을 다녀오고서 9개월만의 재 방문이다. 1월 방문 후에 대리점으로부터 꾸준히 세미나요청을 받았다. 잠재 고객들을 모아 놓을 테니 제품에 대한 세미나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에너지 자원은 없고 전력 가격은 비싼 이스라엘 하수처리 업계는 생활하수의 75%를 고도 처리하여 농업용수 등으로 재사용하기에 뛰어난 에너지절약 제품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방문에만 별도로 시간내기 힘들어 인도에 들어가는 길에 10월중순에 일주일간 시간을 내었다. 그때는 이스라엘 수도인 텔아비브(Tel Aviv)에서 열리는 하수처리 전시회 참가까지 겸하여 세미나를 진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더 큰 이유는 업무를 구실삼아 몇 일간 시간을 내어서 지난 1월에 미처 못 가본 베들레헴(Bethlehem), 맛사다(Masada) 및 사해(Dead Sea)와 요르단(Jordan)의 페트라(Petra)까지 둘러보는 나만의 개인적 여행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아내와 함께 가려 했으나 내가 너무 늦게 출장결정을 하는 바람에 아내가 근무하는 병원에서 미처 휴가를 받지 못해 아쉬웠다. 이번에 가는 팔레스타인 주거지 서안지구(West Bank)내의 베들레헴(Bethlehem)및 요단강(Jordan River)과 에돔(Edom)의 땅 요르단(Jordan)은 방문하기 전부터 소풍 가는 초등학생마냥 나를 설레게 한다.

        전시회와 세미나 이외에도 고객들을 만나는 것으로 나의 스케줄을 꼬박 채워놓은 대리점이었지만 아랍권 안식일인 금요일과 유대인 안식일인 토요일까지의 금/토로 이스라엘에서의 이틀의 개인시간이 났다. 그리고 인도 뭄바이(Mumbai)를 가기 위해 요르단의 암만(Amman)을 거쳐 이동하는 스케줄을 연장하여 요르단에서도 이틀간의 개인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요르단은 아랍권 국가 중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교류가 있는 국가이다. 이웃 아랍국가들과는 달리 기름 한 방울 나지 않는 가난한 요르단에서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여행객들을 끌어들여서 관광수입을 얻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이틀을 어떻게 유용하게 사용할까 미리 계획을 세웠다. 지난 1월 방문에 미처 가보지 못한 맛사다(Masada) 및 사해(Dead Sea)를 위해서 하루,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지인 베들레헴(Bethlehem)을 위해서 하루였다. 그러나 베들레헴만을 하루에 둘러보는 관광 펙키지는 없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서 지척인 베들레헴까지 개인적으로 갈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었다. 베들레헴의 위치가 팔레스타인 서안지구로 벽으로 분리되었기에 개인적 방문의 길고 복잡한 입국절차를 거칠 자신이 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을 하루에 돌아보는 여행 펙키지를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 후에 지금은 요르단(Jordan)의 땅이 된 창세기 속에 나오는 야곱(Jacob)의 쌍둥이 형 에서(Esau/에돔-Edom)의 땅인 페트라(Petra) 및 와디무사(Wadi Musa)를 위해서 이틀 기간으로 관광계획을 세웠다. 쌍둥이 형인 장자로 태어났으나 그 의미를 소홀히 여겨 팟죽 한 그릇에 장자권한을 팔아 넘긴 에서 후예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는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려는 개인적인 관심이었다.

        휴스턴에서 텔아비브(Tel Aviv)까지는 에어프랑스(Air France)로 파리의 드골 공항에서 갈아타고 들어간다. 그런데 파리에서 갈아탄 비행기에는 세계 각지에서 이스라엘을 향하는 단체여행객들이 각각 같은 색의 모자나 조끼, 또는 리본을 달고서 왁자지껄 비행기에 올라타니 빈자리가 없었다. 텔아비브 벤규리온(Ben Gurion) 공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지 입국장에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후에 예루살렘이나 베들레헴에서도 유적지에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덥지도 춥지도 않은 10월은 이스라엘의 관광 성수기인 것 같았다. 호텔도 더 비싸고 모든 비용이 지난 1월에 비해 더 비쌌다.  지난번에는 관광객이 이렇게까지 많지 않았는데따라서 이스라엘 방문의 최적기는 붐비지 않는 1월중순인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단체 투어에 속하지 않고 혼자 입국하는 외국인은 나밖에 없는 것 같았다. 어느 줄에 서야만 입국수속이 빨리 될까 눈치를 보다가 진땀을 흘렸다. 입국장에서 줄에 서서 기다리며 한 시간을 넘게 지체한 것이다. 이번에는 입국관리가 내가 미처 요구도 않는데 입국 스템프를 여권에 찍지 않고 별도의 입국카드를 자동적으로 내어준다. 그러나 먼저와 같이 여권에 테이프로 붙여주지 않는 바람에 혹 따로 날아가 버릴까 잘 보관한다고 경황 중에 깊이 넣은 것이 어디 넣었는지 못 찾아서 나중에 요르단으로 국경을 건널 때 애를 먹게 된다. 다행히 이 잡듯 뒤진 짐 속에서 나와서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입국기록이 없어서 어떻게 되었을까?   

        전시회장에서 3시간 가량 진행한 세미나는 35명의 유대인 업계 관계자들이 모여 관심을 드러냈다. 대리점 사장의 장담대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대리점에서 세미나 참가자들에게 점심을 대접해서 였을까? 유대인들만 이렇게 많이 보아놓고서 세미나를 진행 한 것도 처음이다. 첫마디를 어떤 말로 시작할까를 놓고서 고민을 하였다. 유대인들 대부분은 영어가 제2의 외국어로 영어로 세미나를 진행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다만 떠나기 전부터 고민한 것이 첫마디를 무슨 말로 시작할까? 였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어떻게 한마디라도 복음의 의미를 전달할까? 에 대한 고민이었다. 혹 첫 인사에 예수란 단어를 포함했다가 모두 벌떡 일어나서 나가버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기우에 그냥 유대인 정통 인사법인 “샬롬!”을 세번 외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기로 하였다. 대신 내가 외친 세번 “샬롬!”의 의미는 하나님의 평화!, 예수님의 평화!, 그리고 성령님의 평화! 등 그 속에 삼위일체의 평화를 담았다. 그러나 설명 없이 외친 3번 샬롬의 의미가 그들에게 모호했는지, 아니면 알고도 묵인했는지 모두들 웃으며 같이 내게 샬롬으로 화답 해 주었다. 됐다! 그것으로 되었다. 나는 예수의 복음을 외면하는 이들을 위해 소리 내어 예수의 화평을 빌었으니까..

        전시회와 세미나 이외에도 당장 걸린 프로젝 수주를 위해 고객을 만나러 다녀야 했다. 대리점 사장과 같이 텔아비브 북쪽의 교외에 있는 고객의 사무실을 다녀 오는 중에 조그만 마을을 하나 구경시켜 주었다. 키부츠(kibbutz) 라고 불리는 공동체인데, 이후에 예루살렘을 가는 중에도 몇 개가 눈에 뜨이고 관심을 가지고 보니 이스라엘에는 300여개의 키부츠가 아직도 존재한다. 이들의 시초는 1900년대 초반에 러시아에서 이스라엘 땅의 회복을 위해서 이민 온 러시아계 유대인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대로 마르크스(Marx) 와 엥겔스(Engels) 등 두 명의 러시아계 유대인에게서 시작된 공산주의 사상이 러시아에서 왜곡된 공산국가 건설에 토대를 제공하여 스탈린과 모택동을 통한 공산주의가 20세기 세계 역사를 바꾸었다. 우리 한반도는 지금도 김일성 도당의 왜곡된 공산주의의 휴유증에서 나라가 분단되는 아픔을 지니고 살아간다. 하지만 디아스포라(diaspora)로 러시아에 정착한 유대인으로부터 시작된 그 순수한 초기 공산주의 사상이 1907년 이스라엘의 회복을 외치며 되돌아온 시오니즘 유대인들이 시작한 키브츠가 이곳 이스라엘에서는 아직도 순수하게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말 그대로 같이 일하여 공동으로 생산한 그 수익을 공동으로 누리는 공동체이다.  

        1909년 이스라엘 땅에 되돌아온 수많은 유대인들의 시오니즘(Zionism)운동 중에서 최초의 키부츠가 탄생, 근래에는 약 300을 헤아리며 그 구성원은 10만 명이 넘고, 이스라엘 전 농업인구의 약 20%를 차지한다. 각 키부츠의 구성원 숫자는 일정하지 않다. 농업뿐만 아니라 식품가공, 기계부품제조 등의 경공업을 포함하는 경우도 많다. 기존 경지의 집단화가 아니라 계획적인 입식사업인 점과 철저한 자치조직에 기초를 둔 생활공동체이기도 한 점이 특색이다. 키부츠 구성원은 사유재산을 가지지 않고 토지는 국유, 생산 및 생활재는 공동소유로, 구성원의 전 수입은 키부츠에 귀속된다. 이스라엘의 초대 총리조차 키브츠의 일원이었고 그의 나라에서 받은 봉급이 그대로 키부츠의 재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키부츠의 재정에 의해서 부부단위로 주거가 할당되는데, 식사는 공동식당에서 제공되며, 의류는 계획적인 공동구입과 평등한 배포 등의 관리로 이루어진다. 아이들은18세까지 부모와 별개의 집단생활을 하며, 자치적으로 결정된 방침에 따라서 집단 교육된다. 아랍과의 긴장관계하에서 민병적인 군사적 의의를 가지는 것도 주목된다. 각 키브츠 공동체간의 이동이나 가입, 탈퇴는 자유롭다.

        키부츠(Kibbutz)에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사람을 가리켜 발런티어(Volunteer)라고 한다. Kibbutz Volunteer는 전 세계 각지에서 온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하루 8시간 키부츠내의 여러 가지 일들을 돕는 것이 주된 역할이다. 이에 키부츠에서는 자원봉사자들을 위해 무료숙식과 용돈($150/)을 제공하고 수영장을 비롯한 스포츠 시설 등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 밖에 휴가와 Volunteer Trip도 주어진다. 주로 이스라엘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유럽의 여러 나라 젊은이들이 많이 참여하고 그 밖에 미국, 캐나다, 호주 등의 국가와 러시아, 터어키, 한국, 일본, 대만 등에서도 수많은 나라의 젊은이들이 Kibbutz Volunteer로 참여하고 있다. 참여 가능기간은 6개월이다. 하는 일은 과수원, 정원, 동물원, 식물원, 목화밭, 목장, 양계장, 공장, 호텔, 유치원, 상점, 식당, 주방, 세탁소 등등 매우 다양하다. 자원봉사자는 어느 한 가지 일만 맡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일들을 바꿔가며 하도록 되어 있다. 미리 알았으면 나도 젊었을 때 이곳을 동경했었을 것 같다.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자원봉사로 참여하여 다른 국가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친구 관계를 맺어 볼 만한 좋은 기회였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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