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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슬람 선교의 교두보 터키 방문기 3

      날짜 : 2013. 04.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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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뒤 역사상 최강의 제국인 몽골의 유럽까지의 팽창으로 셀주크 투르크가 망해버리자 아나톨리아 서쪽에서 작은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같은 투르크계인 오즈만(Ozman) 족이 기회를 틈타 드디어 1300년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등장한다(Ottoman Empire). 오토만이 강성해지고서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서 허약해진 서쪽 비잔틴 제국을 공격한다. 오토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이스탄불로 개명해 수도로 삼는다. 기독교국가였던 비쟌틴 제국은 그렇게 오토만에 의해 오랜 역사를 끝내고 이슬람인 오토만 제국이 이스탄불에 들어서서 600년의 찬란한 역사를 시작한다. 이후 오토만은 승승장구해 엄청난 강국이 된다. 그 영역은 서쪽으로는 그리스, 불가리아를 비롯해 서남쪽으로는 지금의 모로코와 북아프리카, 동쪽으로는 지금의 이란 서부, 북쪽으로는 지금의 우크라이나, 남쪽으로는 사우디 및 예멘을 비롯한 아라비아 반도를 차지할 만큼 광대했다. 즉 지중해와 동서양 교차로 전 지역을 영역으로 삼는 지중해 절대강자로 군림한다. 이슬람의 영향을 받았던 투르크인의 오토만이 대제국이 되면서 이슬람 문화와 아랍권의 주인이 된 건 말할 것도 없다.

         

        현재 북아프리카 지역의 이집트, 수단, 리비아, 튀지니, 모로코 등 사하라사막 북쪽의 나라들은 아프리카라기보다 아랍이라고 해야 맞다. 그 이유는 가장 최근까지 그 지역의 주인이었던 오토만 제국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최고 지도자인 술탄은 정치과 더불어 종교적인 리더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중세 유럽에서는 교황과 왕들의 권력싸움이 끊이지 않았던 사실을 비추어보면 오토만 제국에서는 두 권력 모두를 쥐고 있던 술탄의 힘은 가히 엄청났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토만제국 시절에는 모든 점령국들까지 이슬람이 국교가 되도록 강요하였고 기독교권인 서구권과 겨루어 이슬람이 세력을 확장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 와중에 12세기부터 몇 세기에 걸쳐 아나톨리아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중앙아시아 유목생활로 다시 되돌아가서 아직도 같은 언어를 쓰고 말이 통하는 트르크족이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에 현재 3천 만명으로 전체 트르크족은 터키의 75백만과 더불어 현재 1억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600년의 영화가 계속되던 오토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오스트리아 쪽에 붙어 전쟁을 치른다. 오토만 제국은 독일과 함께 결국 패전국이 되는데, 그 영향으로 알바니아, 그리스, 불가리아, 중동, 북아프리카 등 많은 주변 국가들이 독립을 하게 된다. 그리고 아나톨리아 지역이 영국, 프랑스 등에 점령당하게 되고, 그 꼴을 보다 못한 ‘무스타파 케말 아타투르크 (Mustafa Kemel Attaturk) (터키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한국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파샤로 알려졌으나 터키에서는 그냥 아타투르크라 불림) 장군이 연합군에 굴복하는 술탄 체제에 반기를 들고 터키인들의 지지를 받아 터키의 독립운동을 시작한다. 전쟁은 주로 영미 연합군을 등에 업은 그리스와의 전쟁이었다. 아타투르크의 노력으로 터키는 다시 아나톨리아 지역을 회복한다. 아타투르크는 1923년 터키 공화국을 선포하고 생존하고 있던 마지막 술탄에게 ‘죽을래 꺼질래.’의 선택을 강요한다. 이 마지막 황제인 술탄은 그 이후 일반인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면서 익명으로 택시기사 등의 굿은 일을 하다가 죽기 바로 전에야 이스탄불을 찾았다 한다.

         

        아타투르크는 터키의 공화국초기에 개혁을 시도한다. 이슬람 원리주의 종교 국가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언어는 있으나 글이 없어 아랍글자를 사용하던 투르크의 공식 언어표기를 아랍 글자에서 라틴 알파벳으로 변경하고, 무슬림 제국의 영향이 남아있는 수도를 이스탄불에서 소도시였던 앙카라도 옮긴 것도 그때였다. 이슬람 국교를 폐지하고 (그러나 아직도 98%의 터키인은 무슬림이다) 이슬람 율법을 폐지하고 서구식 법률을 제정한다. 일부다처제 금지, 여성의 법적 권리 및 참정권도 인정을 하고 여성이 공공장소에서 반드시 히잡을 쓰는 관습도 폐지하였다. 이슬람 달력대신 국제표준 태양력을 채택하여 휴일이 이슬람권의 금요일에서 서구권과 같은 일요일로 변경된다. 유럽식 근대화의 시작인 것이다. 분명 기존세력의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있었겠지만 혁명보다 더 힘들고 더 단호한 개혁조치로 현재의 터키 근대화에 초석을 다진 지도자이다. 이미 타계하였지만 지금도 아타투르크는 진정한 터키 건국의 아버지로 터키 국민들에게 진심으로 존경을 받는다.

         

        3일을 꼬박 업무에만 매달리다가 4일째인 금요일에는 앙카라를 다녀왔다. 이스탄불에서 새벽부터 서둘러서 이른 이스탄불의 또 다른 동편 지역의 곡센(Goksen) 비행장에서 현지 파트너를 만나 아침비행기로 떠나 50분만에 앙카라에 도착했다. 이스탄불보다는 고지대라서 그런지 4월초에도 아침공기는 무척이나 차가웠다. 앙카라는 터키의 두 번째로 큰 도시이지만 건국 후 개발된 수도이기에 관광 유적지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러나 교육의 도시로 많은 대학들이 있다. 터키는 아랍권의 형님국가이기에 주변의 아랍권에서 많은 아랍 학생들이 터키로 유학을 온다. 따라서 앙카라는 아랍권을 향한 선교 베이스로서 아주 이상적인 도시인 것이다. 역시 업무로 인해 하루 종일 공항과 사무실만을 옮겨 다니면서 사람들을 만나다가 저녁비행기로 되돌아와서 제대로 앙카라를 볼 기회는 없었다. 그러나 만나는 사람마다, 들르는 사무실마다 마음속으로 축복을 하였다. 이 사람들과 이 장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하여 이들이 주의 은혜로 복을 받게 해 달라고

         

        저녁 늦게 다시 이스탄불 동편에 위치한 곡센 공항에 도착하여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서 구시가지의 호텔로 돌아가려니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두 개 밖에 없는 보스포러스 해협 다리 위의 통행량이 장난이 아니었다. 특히 금요일 밤은 다리를 건너 호텔까지 두 시간 넘어 걸릴 수도 있다고 한다. 다리 위에서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보스포러스 해협을 페리(Ferry)를 타고 건너기로 했다. 이스탄불 아시안 사이드의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고 눈에 빤히 바라보이는 유럽 사이드 신시가지 선착장까지 물위로 30여분을 가면 바로 트렘 정류장으로 연결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 위의 트레픽을 피하려 페리를 이용하여 물위의 이스탄불 밤의 풍경을 즐기고 있었다.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배를 타고 건너는 것도 색다른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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