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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스라엘 방문기 5

      날짜 : 2013. 02.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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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호텔로 돌아와 저녁을 먹으러 디베랴 바닷가의 보드워크로 나갔다. 이런 저런 관광상품들을 파는 작은 가게들이 좌우로 늘어서있다. 작은 어시장이 있어서 들어가 보았더니 제법 손바닥만한 생선들을 2,3 종 팔고 있었다. 물어보니 갈릴리 호수에서 오늘 잡은 고기들이라고 했다. 아직도 갈릴리 바닷가에는 베드로와 같은 어부들이 고기를 잡아서 생활을 하는 것이다. 베드로 생선이라 불리는 것은 생긴 것은 꼭 도미 같은데 fresh water fish일 것이다. 주변에 수많은 식당들이 베드로 생선으로 요리를 만들어 팔고 있었다.  그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가 베드로 생선 요리를 시켰다. 요리는 간단했다. 칼집을 내어서 소금을 뿌리고 그릴에 직접 구워서 지중해 특유의 샐러드와 레몬조각 그리고 감자튀김과 함께 주는 것이었다. 가격은 60세겔 이었다. 생선이 생각보다 비리지는 않아 먹을 만 했지만 비늘손질을 제대로 못해서 그런지 간혹 비늘이 씹혔다. 생선을 칼과 포크로만 먹다 보니 젓가락이 있으면 더 잘 발라 먹겠다 싶었다. 물론 고추장이 더해지면 금상첨화 이겠지? 베드로고기가 이곳에서는 제일 유명한 요리란다. 아마도 여기에 오는 순례자들은 한번씩 다 먹어볼 것이다.

         

        다음날 아침 디베랴 해변가에서 호수 위에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아침을 먹었다. 느긋하게 이스라엘 특유의 아침 부페를 조금씩 다 맛보았다. 올리브 픽클 만도 대여섯 가지나 되었다. 까만 올리브, 파란 올리브, 빨간 올리브 등.. 맛도 제각각 이다. 아침을 든든히 먹어야 오늘은 점심을 건너뛸 수 있다. 오늘은 이스라엘을 떠나서 두바이로 가는 날이다. 오후 2시까지는 텔아비브의 벤규리온 공항에 도착해야 한다. 돌아가는 길은 나사렛을 안 거치기에 디베랴에서 벤규리온 공항까지는 두어 시간이면 갈 것이다. 따라서 중간에 2-3 시간의 여유가 있다. 이 남는 시간을 무엇을 할까 아침을 먹으며 인터넷을 뒤지다가 텔아비브 대학에 위치한 디아스포라 뮤지움을 들러보기로 하였다. 물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유명한 뮤지움은 홀로코스트 뮤지움이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뮤지움은 휴스턴에도 있고 벌써 두 번이나 가 보았기에 디아스포라 뮤지움을 네비에 찍고서 출발하였다.

         

        텔아비브에만 나와도 주변환경이 바뀐다. 이스라엘의 인구가 700만이다. 그 중 유대인은 550만이고 무슬림들은 150만이다. 이 무슬림들은 현재 팔레스타인 보호지역에 사는 팔레스타인 무슬림들이 아니라 건국 당시 둘로 나뉜 이스라엘 쪽에 주어진 땅에 예전부터 몇 세대를 살아온 무슬림들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우리가 기억하는 옛 지명들은 이들 무슬림들이 차지하여 살고 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건국 후에 세계각처에서 이주하여 새로운 터전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여 살고 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사는 곳과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 삶의 질에서 차이가 난다. 텔아비브는 미국의 한 도시에 온 기분이 난다. 길도 넓고 깨끗하다. 텔아비브 대학은 텔아비브 북쪽에 위치하며 1948년 건국 후 설립된 대학이기에 그리 오래된 건물들은 없다. 캠퍼스도 마치 미국내의 여느 대학과 다름이 없다. 이곳에 디아스포라 뮤지움이 자리잡고 있다. 

         

        디아스포라는 그리스어로 흩어짐을 뜻한다. 성경을 보면 솔로몬 이후 이스라엘의 12지파는 북이스라엘의 10지파와 남유다의 2지파로 나라가 둘로 나뉜다. 그러나 배교를 일삼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BC722 에 멸망을 당하고는 앗수르의 다른 지역으로 노예로 강제 이주 당한다. 강제이주 당한 10지파는 그곳에서도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이방인화 되어 버린다. 정복자 앗수르는 자신들의 종교와 관습들을 가지고 북이스라엘에 들어와서 정착하며 이스라엘과 피가 섞여 이후 사마리아인으로 불린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멸시한 것이 이 때문이다.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이처럼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의 10지파에게 디아스포라는 해당되지 않는다. ‘디아스포라는 단순히 흩어진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남는 자들에게만 붙여지는 말이기 때문이다.

         

        남유다 역시 BC 586년에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여서 예루살렘이 황폐화되고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간다. 그러나 유다지파는 북이스라엘과는 달리 포로생활에서도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BC516년 일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재건을 하지만 일부는 바벨론에 남아서 말씀(구약)과 메시아의 약속을 붙잡고 살아간다. 히브리 언어도 잃지 않고 붙잡는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유대인들도 학사 에스라에 의하여 말씀을 붙잡는 훈련을 한다. 그 후 AD70년에 예루살렘이 로마에 의해 멸망을 하고 또다시 유대인들은 나라를 잃고 세계각처로 흩어진다. 그러나 세계 각처로 흩어진 유대인들은 이때부터 2천년간 말씀(구약)을 붙잡고 메시야를 기다리며 그 오랫동안 정체성을 잃지 않는다. 2천년에 걸쳐 지속적으로 자녀들에게 역사를 가르치고 말씀을 가르치고 언어를 가르친다. 이때부터 유대인또는 ‘Jewish’라는 말이 생겨났다. 어느 나라에 거주해서 살더라도 유대인으로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갔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세계 각처에 흩어진 특정 민족이 2천년 동안 정체성을 잃지 않고 언어도 잃지 않고 2천년후에 나라를 재 건국하는 일은 전무 후무 할 것이다. 

         

        이것을 기념하는 기념관이 디아스포라 뮤지움이다. 이 곳은 사실 타민족이 방문하는 곳은 아니다. 들어가서 전시관을 도는 동안에 주변을 살펴보아도 유대인이 아닌 사람은 나 혼자였다. 유대인들이 자기 자녀들에게 교육용으로 만들어놓은 전시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아들을 데리고,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들어와서 자세하게 유대인의 역사를 설명하는 모습을 여기 저기서 보게 된다. 유대인들은 자녀교육에 목숨을 건다. 한두살, 갓 말하기 시작할 때부터 성경말씀과 언어를 의무적으로 가르친다. 학교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직접 가르친다. 특히 밖에 나가 일하는 아버지보다 집에 있는 어머니의 역할이 크다. 어머니가 신앙교육을 담당하기에 유대인들은 아버지가 유대인일 때 보다는 어머니가 유대인일 때 유대인으로 인정받는다. 선천적인 피의 조건보다는 후천적인 교육 조건이 더 중요하다는 것일까?

         

        말씀이 힘이라는 것이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보면서 부인할 수 없다. 비록 반쪽 짜리 말씀인 구약만을 붙잡았지만 신명기 11:18 말씀대로 나의 이 명령을 너의 마음과 생각에 단단히 새기고 너희 손목에 매고 이마에 두르라.” 는 명령대로 유대인들은 말씀을 실지로 손목에 매고 이마에 두르고 다니는 도구들도 전시장에 전시해 놓았다. 배교하고 말씀을 가볍게 여긴 북이스라엘 10지파는 역사에서 영영 사라졌지만 처절할 정도로 말씀을 귀하게 여기고 대대로 자녀에게 가르쳐온 유대인들은 2천년 디아스포라에서도 살아남은 것이다. 600만의 희생자가 생긴 2차대전의 홀로코스트 끝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원래 자리에 나라를 되찾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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