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일찍이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가벼운 옷차림으로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 매었다. 예루살렘성과 감람산을 오르려면 오늘은 많이 걸어야 한다. 투어가이드와 함께 걸어서 두 곳을 돌아보는 여정이다. 예루살렘의
겨울은 고지라서 아침저녁으로는 쌀쌀했다. 그러나 사막기후라서 외투를 입으면 따듯한 오후에는 거추장스러워지기에
그냥 가볍게 입고 많이 움직이기로 했다. 방문 한 주 전에는 예루살렘에 눈이 쌓였다고 하는데 내가 가는
날에는 파란하늘의 화창한 날씨가 나를 반겼다. ‘나오미’라는
이름의 투어가이드는 히브리대학에서 역사와 언어를 공부하는 유대인 대학원생이다. 7명의 여행자가 일본인, 젊은
독일인부부, 영국인노부부, 호주인 그리고 나, 한국인이다. 물어보니 일본인은 성지순례중인 기독교인 이란다, 일본내의 1%도 안 되는 기독교인은 소수이지만 정말 진국이다. 일부러 예수님의 발자취를 순례하기 위해 먼 길을 온 것이다. 예루살렘에
혼자 가더라도 투어 가이드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책이나 웹사이트에서도 얻지 못하는 구전으로 전해 내려오는 귀한 이야기들을 직접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성은 성벽 안에 ‘알메니언
쿼터’, ‘유대인 쿼터’, ‘크리스천 쿼터’그리고 ‘무슬림 쿼터’ 등 4개 지역으로 구분되어 있다. 왜 뜻하지 않게 알메니언들이 한 쿼터를
차지하고 있느냐고 투어 가이드에게 물었다. AD 313년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화하고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첫 나라가 ‘알메니아’이다. 이들 중 일부가 13세기 십자군의 예루살렘 회복전쟁 때 같이 들어와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리고 20세기 초 터어키의 기독교말살정책인
‘알메니아 대학살’을 피해 예루살렘으로의 대량 이민하여
이곳에 거주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는 거주자의 권리에 의해 이스라엘로부터 예루살렘성의 1/4을 할당 받은 것이다. 알메니안 구역의 ‘성 야고보’ 교회는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최초의 '예루살렘 교회 공의회'가 열린 곳이라고 한다. 이곳은 2명의 야고보를 기념하는 교회이다. 하나는 예수님의 동생으로 초대 주교였던 성 야고보와 예수님의 제자 요한의 형인 야고보로 이들 2명의 시신이 이 교회에 묻혀 있다. 오순절 역사가 일어난 ‘마가의 다락방’도 이곳에 있다. 물론
두 개의 건물이 다 당시 원래의 건물이 아니라 그 자리에 다시 지어진 것들이다.
유대인쿼터는 시온문 주변으로 통곡의 벽까지 동남쪽지역이다. 예루살렘을 점령했던 아랍연합군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후 재건되었기에 새로운 건물들이 깨끗하게 지어졌다. 성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은 그리 많지 않고 거의 기념관과 회당이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은 신도시에 거주한다. 그러나 성안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을 위한 학교도 있다. 유대인들의 집은 쉽게 구별이 되었다. 출입구 문지방에 두루마리로
하나님의 말씀을 뜻하는 scroll 형상을 박아 놓았다. 마치
출애급 당시 유월절에 이스라엘인 집들의 문지방에만 어린양의 피를 발랐던 것처럼… 투어가이드가 시온문쪽의 성벽에서 동쪽 감람산 남쪽방향으로 200여 미터 아래로 멀리 내려다 보이는 골짜기를 가르키며 이제는 말라서 풀이 파릇하게 돋아있는 움푹 패인곳이
당시의 물이 고여있던 ‘실로암’이었다고 한다. 성 동북쪽의 기혼샘이 성전산과 감람산의 골짜리고 흘러 동남쪽의 실로암으로 흘러 들어갔고 기혼샘을 이용해 성안으로
수로를 만들어 물이 성안으로 흐르도록 했다고 한다.
성내 서북쪽 지역이 ‘크리스천
쿼터’이다. 그러나 이들은 전부 구교도들이다. 로마 카톨릭, 동방정교, 러시아정교, 그리고 이집트 콥틱 등 약 3천명의 구교 주민들이 이곳에 살고 있다. 각자의 종파들의 교회당들이 이곳에 있다. 교회주변에는 수많은 장사치들이
여행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한다. '성 무덤교회'(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혔던 골고다언덕과 그의 무덤을 보존하기 위하여
335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어머니 ‘헬레나 황후’의
지시로 건립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건물이다. 각각의 종파가 골고다언덕에 세워진 성 분묘 교회내부를
나누어 관리를 하는데 하도 종파끼리의 알력이 심하여 이스라엘 정부에서 교회의 열쇄를 특정 종파에게 맡기지 못하고 중립적인 무슬림에게 맡기어 교회의
문을 무슬림이 열고 닫는 우스운 일이 일어나는 곳이다. 구교만해도 종파끼리의 알력이 심한데 신교에게도
지역이 주어졌으면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루터교 등등의 알력은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그리고 동북쪽 성내에 옛 솔로몬 성전터에 세워진 바위돔(Dome of the Rock) 주변으로 무슬림 쿼터가 있다. 성내에는
약 2만5천명이, 다메섹문과
헤롯문을 통한 성밖에는 수십만의 무슬림들이 좁고 지저분한 게토 지역에서 집단을 이루며 살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이 로마에 멸망한 후부터 이곳에 터전을 잡고 거의 2천 년을 살고 있는 터주대감들이다. 7세기 이곳을 통치했던 아랍인들은 성전산의
큰 바위 위에서 자신들의 최고의 선지자 모하메드가 승천했다는 전설에 따라 그의 발자국이 남아 있다는 바위를 종교적으로 기념 및 보존하기 위해 대사원을
건축했다. 후에 재건되어 현재 예루살렘의 대표적 건축물이 되고 있는
'바위 돔'은 위에 솟아 오른 돔(dome)만
지름이 78피트, 높이가
108피트의 대형 건축물이다. 최근에 요르단의 후세인왕의 헌금으로 24K 순금판으로 덧쒸워져 있어서 태양빛이 비칠 때는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반사되어 황금사원이라고도 불린다. 이슬람권에서는 메카, 메디나와 함께 예루살렘을 3대 성지로 꼽고 있다. 이 바위돔은 예루살렘 어느 곳에서든지 눈에
뜨이게 잘 보였다. 그런데 나는 이것을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다. “거룩한 곳에 가증한 것이 선 것을 보거든”..
바위돔이 있는 성전산에 오르려면 이스라엘 군인들이 지키는 검색대를
통과하여야 한다. 먼저 언급하였듯이 유대인들은 성전산에 혹 성소나 지성소 자리를 밟을까 봐서 오르지
않는다. 무슬림들은 그들의 예배처소인 모스크가 있기에 그들의 주거지에서 직접 이스라엘군이 지키는 검색대를
통과하여 아무 때나 올라간다. 그러나 순례자들은 정해진 시간에만 올라갈 수 있다. 통곡의벽을 들어가는 검색대 옆에 성전산에 오르는 순례자들을 위한 검색대가 따로 있다. 이곳에서는 성경이나 십자가 등을 가지고 오르지나 않는지 이스라엘 군인들이 모든 가방을 뒤져서 철저하게 검색한다. 혹 순레자들이 이슬람의 성지인 바위돔에서 십자가나 성경을 꺼내서 아랍권을 자극 할까 봐 미리 걸리는 것이었다. 실지로 내 앞의 여자는 십자가 목걸이가 발견되어 주머니에 넣고 꺼내지 않겠다는 데도 오르기를 허락 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가까이 올라가서 본 황금사원은 황금빛에 찬란하였다. 나는
무슬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 조용히 마음속으로 찬양하면서 바위돔 주변을 돌고 또 돌았다. “예루~살렘, 예루~살렘 그 찬란한 성아, 호산나
노래하자 호산나 부르자”…
이 무슬림쿼터에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까지 걸으셨던
‘고난의길’ via Dolorosa 가 시작되어 크리스찬
쿼터의 골고다언덕이었다는 '성 무덤교회'에서 끝난다. 지금은 흔적이 없지만 예수님 당시 십자가형을 언도
받으셨던 빌라도의 법정자리가 지금의 무슬림쿼터에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 각국에서 그룹으로 오는 성지순례자들은
실지로 나무십자가를 메고 고난의 길을 뒤따라가는 행렬들이 계속된다. 그런데 이 고난의길 좌우에는 거주민들과
관광객들을 위한 상점들이 즐비하여 무슬림들이 왁자지껄하게 고객을 불러대는 소리가 조용히 걸으면서 십자가지신 예수님의 고난을 상기해 보기를 원하는
순례자들을 거슬리게 만든다. 나도 “십자가의길 거친 언덕길, 외롭고 무서웠던 길’ 이라는 복음송을 조용히 부르면서 이 길을 걸어
보기를 소원했지만 주변의 소음으로 인해 영 집중하기가 힘들다. 지금의 실상은 외롭고 거친 길이라기 보다는
상인들에게 부대끼고 시달리는 길이다. 길이는 약 500미터
정도 되는 길이다. 이 길의 끝은 '성 무덤교회'이다. 왜 고난의 끝이 부활이 되어야지 무덤으로 끝나는지는 아리송하지만...
골고다언덕과 무덤이 있다고 믿어지는 '성 무덤교회' 건물은 무척 크다. 4세기에 콘스탄틴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 지금까지 보존된 것 같지는 않고
그 자리에 새로 지어진 건물일 것이다. 내부에 들어가면 촛불을 켜서 조명을 하였기에 어두워 한참을 지나야
사물이 구별된다. 각 종파가 교회 4개의 구석마다 각자의
예배처소를 만들어 놓았고 중앙 2층에 올라가면 내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이는데 골고다 언덕자리였단다. 그곳에는 100여명이 넘는 인파가 줄을 서 있었다. 순례자들이 골고다에 엎드려
기도하고 사제들에게 기도문을 주고 나오는 줄이다. 나는 그 긴 줄에 설 생각은 못하고 기도하고 나오는
그 반대로 가 보았는데… 자세히
보니 기도하고 나오는 사람들이 사제들에게 건네는 기도문에 화폐를 끼워서 주는 것이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면 돌아가신 예수님의 시체를 수의로 갈아 입힌 바위라는데
이곳에서도 이층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자기의 윗도리, 가방, 지갑
등 개인소지품들을 그 바위에다 대고 문지르는 것이었다. 마치 비벼대는 물건에 예수님의 권능이 옮겨 온다고
믿는 것처럼.. 서로 더 가까이 가지 못해서 아수라장이었다. 개중에는
한국사람들도 보였다. 이곳에서도 여전히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할 것 같았다.
철저히 모세의 율법에 따라 스스로를 얽매여 생활하는 유대인들과
또 다른 속박인 모하메드의 이슬람 율법을 따르는 무슬림들이 뒤섞여 사는 예루살렘은 두 가지 다른 각각의 율법이 거주민들을 지배한다. 예루살렘 성내에서도 하루 5번씩 기도시간만 되면 만사를 제쳐두고
메카를 향하여 엎드려 엉덩이를 치켜들고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많이 목격하였다. 좁은 기념품 가게들에 들어가도
가게 뒤편에 엎드려 기도하는 무슬림들을 심심찮게 보았다. 그런데 크리스챤들 조차 이렇게 성경에도 없는
율법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것이다. 아니 이건 율법이라기 보다는 미신이었다. 복을 받기 위한 미신. 복을 받기 위한 복채. 율법과 미신에서 자유를 선포하러 오신 예수님이 사역하시고 돌아가신 예루살렘은 지금도 여전히 이런 저런 율법과 미신에 눌린
땅인 것이다.
또 다른 골고다언덕이라 알려진 동산무덤(garden tomb)을 가 보았다. 이곳은 꼭 가보아야 할 곳으로 미리 메모했던 장소이다. 성 북쪽 다메섹문을 나와 도로를 건너서 garden tomb 사인을 따라 200미터쯤 가면 무슬림 주거지역에 동산무덤 (garden tomb)이 나온다. 해골모양의 언덕 주변에 2000년 전 시대의 묘와 같은 매장지가 발견되어 성서학자들 중에서는 이곳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갈보리 언덕’이라고 주장한다. 예루살렘에 ‘골고다언덕’이라 주장 하는 데가 두 군데이다. 구교에서 이미 1700년 동안이나 성지로 여겨왔던 ‘성 무덤교회’를 정면으로 반박하는 주장이나 신교에서는 근래에 발견된 이곳이 골고다와 예수님의 매장지로 인정하는 추세이다. 이유는 유대인들의 관습이 시체를 성내에 두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당연히 처형장소도 성내가 아니었다는 얘기이다. 그리고 십자가 형은 많은 사람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는 공개처형 제도이기에 왕래가 많은 다메섹으로 가는 길목에서 처형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설명을 듣고 후에 호텔에 돌아와 성경을 찾아보니 요한19:20에 “예수의 못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움으로” 라는 표현이
나오고 예수님의 부활 후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이 대제사장에게 알리러 “성안으로” 들어갔다는 표현이 나온다.
따라서 성밖이면서 멀리 않은 이곳이 골고다일 가능성이 높다. 성내에 있는 ‘성 무덤교회’는 성경에 의하면 실지 골고다가 아닐 것이다. 구교가 지난 1700년이나 성무덤교회를 성지로 지정하여 많은 순례자들을 속여 온것이다. 수많은 순례자들이 예수님의 죽음과 상관없는 바위를 붙들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는 것이다 . 구교의 순례행렬과 같은 번잡함이 없는 이곳은 찾는 이도 많지 않아 조용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동산으로 여겨지는 화원도 있어 번잡한 예루살렘성을 벗어나 기도하며 사색에 잠기기 좋은 곳이다. 다만
갈보리언덕을 무슬림들이 펜스로 막아놓아 멀리서만 바라봐야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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