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월에 이스라엘을 다녀왔다. 평소에 이스라엘은 워낙 작고 소외된 시장이기에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뜻하지 않게 기계를 납품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기에 두바이를 통해 인도에 다녀오는 길에 아예 이스라엘까지 들러 오기로 계획을
하였다. 예전부터 성경에서만 접했던
예수님의 행적의 장소들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일부러 이스라엘 방문까지를 억지로 끼워 맞추고 고객과 만남 후 개인적 여행시간도 3일을 추가하였다. 또 언제 성지를 방문하는 기회가 있으랴 싶었기에
조금 무리를 한 것이다..
휴스턴에서 두바이까지는 에메레이트항공 직항으로 한번에 간다. 두바이공항은 인도를 비롯해 전세계 대다수의 도시들에 직항이 연결되는 세계적인 대규모 국제공항이다. 그러나 오히려 두바이에서 가까운 이스라엘로의 직항은 없었다. 아랍권
국가들과 이스라엘간은 여전히 중동의 화약고이고 긴장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그나마 아랍권에서는 그래도
이스라엘과 이웃으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요르단을 통해서는 암만에서 텔아비브로 연결편이 되었다. 암만에서
텔아비브까지는 30분도 채 안 걸리는 짧은 비행거리이다.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요르단과 이스라엘은 요단강 동편에서 국경이 갈리는 것 같은데 푸르른 산들과 누런 광야로 뚜렸히 대비가 되었다. 원래부터 그런 것인지 이스라엘의 건국
후 개발된 관계시설로 인해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늘에서 바라보이는 땅은 대비되는 색으로 인해 국경이 가늠되었다.
텔아비브의 벤규리온 공항에 도착하니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주변의 아랍국가와 긴장관계에 있는 이스라엘에 방문자들을 대상으로 빈틈없는 입국심사이다. 그런데 의외로 임국심사관은 흑인이었다. 이티오피아에 흑인 유대인들이
있다는 말은 들어보았는데 흑인유대인을 입국 심사관으로 만날 줄이야.. 예상은 했지만 나의 여권에 찍혀있는 5년짜리
사우디 복수비자와 지난 2년간 세번의 사우디 입국이 문제가 되었다. 무슨
이유로 사우디에 입국을 하였었는지, 가서 무슨 활동을 하였는지를 꽤나 집요하게 물어보고는 이스라엘 업체에
직접 전화까지 해 보고 나서야 입국심사를 통과 하였다. 그러나 내 요청에 입국도장은 안 찍고 별도로
붙이는 스템프를 끼워 주는 것이었다. 앞으로도 내가 아랍국가들에 계속 들어가야 하니 알아서 하라는 배려였다. 물론 여권에 이스라엘 입국도장이 찍히면 당장 두바이로 되돌아가도 입국이 허용이 안되기 때문이었다.
공항서 수도 텔아비브시내까지는
10마일도 채 안되는 짧은 거리이다. 눈에 보이는 텔아비브의 거리풍경은 미국이나 유럽의
신시가지와 다른 점이 없었다. 공항부터의 택시비도 역시 미국이나 유럽과 비슷한 수준인 140세겔(40불)이었다. 텔아비브의 호텔비와 기타 식당의 물가도 미국보다는 비쌌다. 방문시기가 1월 중순이었는데도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텔아비브의 겨울은 온화한 휴스턴 기후와 비슷하였다. 남북으로 지중해를 끼고 모래사장과 보드워크가 20키로 이상 계속되어
관광객들을 불러모으는 관광지이다. 남쪽으로는 성경에 나오는 욥바(Jaffa)항이
멀리 눈에 보인다. 요나가 배를 타고 다시스로 도망하였던 항구이나 이스라엘이 로마에 의해 멸망된 후
토착민들이 들어와 살면서 무슬림화되고 이슬람사원과 무슬림 주거지가 자리잡고 있다. 수도 텔아비브는 1948년 이스라엘 건국 후 욥바 북쪽 지중해연안에 새로 세워진 도시이다. 이
관광지 보드워크를 낀 식당에서 고객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나오는데 갑자기 눈에 뜨이는 거리에 뿌려진 이 전단지들의 정체는??? 한국 강남의 밤거리에 뿌려지는 성매매 전단지와 같은 요상한 전단지들을 성지로 생각했던 이스라엘 텔아비브의
밤거리에서도 볼 줄이야… 솔직히 예상치 못했던 이스라엘의 문화충격이었다.
금요일 오후 일찍 텔아비브에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버스로 출발하였다.
마음이 조급하였다. 이스라엘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안식일의 시작이기 때문이기에 교통편이
끊어지기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택시로 호텔까지 들어가야 했기 때문이다. 차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짧은 거리이지만 예루살렘은 해발 750미터에 위치해 있기에 완만한 상승세로 산으로 올라간다. 드디어 오후 두시쯤 도착한 예루살렘의 신시가지에는 까만 의복을 입고 까만 모자를 쓴 수많은 유대인들이 금요일오후
안식일을 준비하는 음식물 등을 미리 사느라 길거리가 매우 붐볐다. 금요일 해 질 때부터 토요일 해 질
때까지 유대인의 안식일이기에 모든 대중교통이 끊어진다. 식당과 식품점도 문을 닫는다. 그나마 예수살렘에 거하는 수십만명의 무슬림도 금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기에 무슬림 식당도 금요일은 아침부터 문을
닫는다. 그리 많지 않은 구교도 크리스찬만 금요일 정상영업을 하지만 별로 눈에 뜨이지 않는다. 따라서 금요일 저녁은 거의 온 예루살렘이 마비된다. 금요일 저녁에는
예루살렘에서 음식준비를 못해 놓으면 굶어야 한다. 호텔에 체크한 후 간단히 저녁거리를 미리 사서 챙겨
놓아야 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는 운전을 안 한다. 호텔의 엘리베이터 조차도 자동적으로 모든 층에 다 서기에 버튼을 누를 일이 없다. 대중 화장실의 수도조차 그대로 쫄졸 쏟아져 나오게 해 놓았다. 회당에
가는 일 외에는 외출도 삼간다. 음식도 레위기에서 금한 음식을 제외한 허용된 음식만을 뜻하는 kosher 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이 많다. 또한 코셔를 공식으로 인정해주는 사람들은 레위 제사장의 일부인 성직이다. 식당 앞에도 kosher식당인지
non-kosher 식당인지를 구별하여 적어 놓았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선민들은 코셔
음식을 먹으면서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슬림들은 또 역시 율법에서 금한 음식을 제외한 하렐음식을
먹는다. 하렐음식 역시 무슬림 이맘이 율법에 의해 공식으로 하렐로 인정한 음식만으로 하렐 식품점에서
판매한다. 그 외는 이방인들이
먹는 음식이다. 유대인과 무슬림이 한 도시에서 서로 자기들의 음식만이 신이 인정한 음식이라 우기는 예루살렘에서만
볼 수 있는 재미있는 풍경이다.
예루살렘은 어원적으로 ‘평화의
도시’ (IR=도시, SHALOM=평화)를 뜻한다고 한다. 하지만 이름과는 반대로 3천년 전 다윗 왕국의 수도로 세워진 이래, 수많은 침략자들에 의해
침략당하고 주민들은 죽거나 쫓겨나는 험난한 역사로 점철되어 있다. 서기 70년 로마의 침략으로 나라를 빼앗기고 2천 년간 세계를 방황하던
유태인들은 드디어 1948년 꿈에도 그리던 나라를 되찾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유엔 총회에서 영국의 위임통치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 땅의 반을 유대인에게 되돌려 주는
팔레스타인 분할을 결의했다. 아랍권이 이를 거부했지만 유대인들은
1948년 전격적으로 이스라엘 건국을 선포했다.
건국 당시 예루살렘은 유엔 통치 하에 두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독립 선포에 불만을 품은 이집트, 요르단, 시리아, 레바논, 이라크로
구성된 아랍 연합군은 하루 만에 이스라엘을 침공하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분쟁의 서막을 올렸다. 1차 중동 전쟁의 결과로 예루살렘은 ‘동예루살렘과 서예루살렘’으로 분할되었다. ‘서예루살렘’은
이스라엘, ‘예루살렘 성’이 있는 ‘동예루살렘’은 요르단의 땅이 되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6일 전쟁으로 알려진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 때,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그리고 팔레스타인 보호구역이라는 명분하에 가자지구 (gaza strip)와 서안지구 (west bank)를 둘러싼 벽을 설치하여 이스라엘과 차단시키는 자치구를 허용하여 출입을 감시한다. 우리가 익히 아는 베들레헴, 여리고 그리고 사마리아가 현재의 벽으로
막혀서 팔레스타인 거주지역인 서안지구로 이스라엘 군에 의해 출입이 통제된다.
현재 예루살렘은 ‘구도시와
신도시’로 나누어져 있다. 구도시의 서쪽에 위치한 신도시 (New City)는 구도시의 100배가 넘는 신시가지로 발달하였다. 구도시 (Old City)는 1평방
킬로미터에 불과한 성벽 안의 도시이다. 그러나 이곳은 세계 3대
종교의 성지이다. 유태교에게는 솔로몬의 성전(제1성전)이 세워지고 바벨론 침공으로 무너진 곳에 포로귀환 후 다시 성전과
성벽을 세웠고(제2성전) 로마에
의해 성전이 돌 하나 남김없이 파괴된 곳이다. 기독교에게는 예루살렘이 예수님이 붙잡히시고 고난 받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 가셨다 다시 부활하신 곳이고 장차 다시 재림하여 회복하실 곳이기도 하다. 이슬람교에게는
무함마드가 승천한 곳으로 믿어지는 자리에 현재 이슬람의 웅장한 금빛 모스크가 옛 유대인 성전자리에 서 있다. 전세계
무슬림의 자존심이기에 이스라엘에서도 현재의 모스크를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 잘못 건드렸다가는 아랍국가들과
바로 전쟁이 일어난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그 어느 종교도 양보할 수 없는 성지가 되어 지금도 세계인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는 곳이다.
통일 이스라엘 왕국의 왕으로 등극한 다윗이 수도를 헤브론(Hebron)에서 유대인들에게 조상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 드렸던 모리아산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는 현재의 예루살렘으로
옮겼다. 다윗은 이곳에 법궤를 안치할 성전을 건축하려 했으나, 하나님은
다윗의 손을 통해 성전이 건축되기를 허락하지 않으셨고 아들인 솔로몬에 의해 건축된다 (제1성전). 솔로몬 성전은 BC 959년에
준공되었다. 그러나 BC 586년에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제3차 침공 때 남 왕국 유다의 멸망과 함께 완전히 훼파되었고, 성전의
금, 은, 놋 기명과 보물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옮겨졌다.
70년 후에 바벨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의 왕 ‘고레스’는 포로들은 모두 본국으로 귀환하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른바 ‘고레스 칙령’이다. 1차
귀환은 총독이었던 ‘스룹바벨’, 2차 귀환은 학자이던 ‘에스라’, 3차 귀환은 ‘느헤미야’의 지도 하에 이루어졌다. ‘스룹바벨’은 무너진 성전을 재건하였고(제2성전), 에스라는 무너진 백성들의 마음을 회복시켰고,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였다. 500년 후 예수님 당시 이방인 출신인 헤롯왕은 유대인에 대한 ‘유화정책’으로 ‘제 2 성전’을 확장하였다. 80년에
걸쳐 확장된 이 헤롯성전은 그러나 완공된지 불과 수 년 후인 AD 70년에 예수님의 예언처럼 로마군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성전에 있던 금들이 화재로 녹아 돌 사이에
스며들었고, 로마 군인들이 이 금을 찾기 위해 모든 돌을 다 헤쳐버려 돌 위에 돌이 하나도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 이후에 예루살렘은
오랬동안 폐허가 되었다가 이곳에 정착한 무슬림들이 이 플랫폼위에 이슬람 모스크를 건설하여 오늘에 이르는 것이다,
금요일 오후, 아직도
해가 지려면 두어 시간 남았기에 간편한 차림으로 예루살렘 성을 한 바퀴 돌아보려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호텔서
걸어서 가장 가까운 성문이 욥바문이다. 예루살렘에는 총 8개의
문이 있다. 욥바문, 시온문, 똥문(dung gate-성밖에 똥이 쌓이곤 했다 해서 붙여진 이름), 미문(예수님이 이 문을 통해 예루살렘성에 입성하시고, 베드로가 지나가다 앉은뱅이를 고친 golden gate 라고도 한다), 사자문(초대교회 스데반 집사가 이 문 앞에서 순교를 당해서
‘스데반 문’(Stephan’s Gate) 또한 성전의 제물로 사용될 양들이 이곳을 통과했기에 ‘양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헤롯문,
다메섹문, 새문 등이 있다. 그러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감람산을 바라보며 성경에서 ‘미문’이라 불렸던 황금문‘golden gate’는 폐쇄되었다. 이곳 미문은 많은 전설이 있다. 유대인들은 에스겔 44장 1-3절의
언급과 같이 메시야가 올 때에 이 문이 열린다고 믿고 있다. 또한 회교인들도 마지막 심판의 날이 이곳에서
일어날 것이라고 믿고 있다. 따라서 마지막 날에는 이 미문 가까이에 있는 무덤부터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 부활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가 미문 근처에 묻히기를 원한다. 현재 미문 근처는 물론 건너편
감람산 기슭까지 묘지로 가득 차 있다.
성안에는 들어가지 아니하고 성 밖으로만 시계반대 방향으로 성벽을
따라 걸었는데 사진을 찍느라 그랬는지 다시 욥바문까지 되돌아오기까지 두어 시간이 넘게 걸었다. 그런데
까만 의복의 유대인들이 부지런히 시온문 방향으로 몰려가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따라가
보았다. 시온문을 통과하여 계속 성안으로 들어간다. 금요일
저녁 해지는 시간이니 아마도 회당에 가는 것이리라 생각이 들어서 뒤 따라갔다, 그러나 금방 앞뒤로 몰려들어
앞으로 미는 유대인들의 행렬 속에 들어가 뒤돌아 가지도 못하고 같이 움직일 수 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어차피
가보려 했던 길이니 계속 같이 움직여서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공항 검색대와 같은 곳을 통과하여야
되었다, 그리고 나타난 곳은 그 유명한 ‘통곡의 벽’이었다,
헤롯 성전의 서쪽 바깥 벽 중 일부 약 450m 정도의 터전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이 위에 벽을 재건하여
‘통곡의 벽’(The Wailing Wall)이라고 부른다. 이는 유대인이 이곳에 와서 성전이 파괴된 것과 나라를 잃은 자신들의 처지를 슬퍼하여 통곡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이곳 ‘통곡의 벽’은 유대인들이 기도하는 거룩한 장소이다. 옛성전이 있던 플랫폼 자리에는
지금은 무슬림 모스크가 세워졌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옛 성전의 성소와 지성소가 있던 자리이다. 성소와 지성소의
자리가 정확히 어디였는지 모르는 유대인들은 혹 부지불식간에 성소나 지성소를 밟을까 봐서 성전자리에 오르지는 않는다. 대신 무슬림들과 순례자들에게는 오르게 허용을 한다. 그리고 성전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통곡의 벽에 와서 기도하며 우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물론 전 세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순례차 와서 소원이 적힌 쪽지를 벽의 돌 틈새에 끼워 가며 기도를 하곤 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안식일
첫 시간 예배를 하면서 예루살렘성 주변의 유대인들은 금요일 해질녁에는 모두 이곳으로 몰려드는 것이다,
통곡의 벽 광장에 들어가니 눈짐작으로만 수만명의 까만 예복의
유대인들이 통곡의 벽을 바라보고 빽빽히 서서 기도문을 외우거나 뒤의 광장에서는 동그랗게 손을 잡아서 원을 그리고는 점프를 하면서 찬양을 하는 것이었다, 주변에 원을 만든 팀이 수십개는 만들어졌다 해체되고 다시 만들어 지는 반복이었다. 여자는 여자들끼리, 남자는 남자들끼리. 통곡의 벽을 여자와 남자 사이에 펜스를 만들어 놓았다. 대단한 광경이었다. 모르고
사진을 서너장 찍었는데 누군가가 와서 사진 찍기를 금하는 것이었다. 얼른 머쓱해서 사진기를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그리고는 나도 기도에
동참하였다. 어차피 방식은 달라도 대상은 같은 하나님 아닌가? 2천년간의
디아스포라에서 끈질기게 살아남은 생명력의 유태인들의 열정적인 예배광경에 눈물이 났다, 이러한 열정이
있었기에 홀로코스트와 같은 고난에서도 살아남아 다시 국가를 이룬 것이 아닌가?
-2번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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