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주변에서 아무도 나를 알지 못하는 지구 반대편의 호텔방에 덩그라니 혼자 있다 보면 온갖 세상적 유혹이 엄습한다. 남자 혼자서 여행지에서 시간이 남을 때 실질적인 영적전쟁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눌러온다. 여행지에서 혼자 있는 시간은 마귀에게 틈을 주는 시간이다.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과 같이 있을 때는 믿음이 지켜진다. 아니, 연출되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나의 생각의 기차가 어디를 향해 달려가는가가 나의 진짜 신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는 나는 아직도 하나님앞에 부끄럽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소한 전투에서 이기기란 쉽지 않다. 몇 번의 전투에서 패하는 것이 습관이 되면 아예 전쟁마저 패할는지 모른다. 나가면 집이 그리워진다. 집에 오면 혼자 있는 불안함에서 해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전도여행을 보낼 때 둘둘씩 짝을 지으신 것 같다. 혼자 있음으로 마귀에게 틈을 주어 영적에너지를 소비하지 말고 서로에게 격려와 영적 감시자(??)가 되라고… 터기 선교지에 나가있는 아들 진수가 보내오는 선교편지를 보면 흐뭇하다. 동역자들과 24시간 같이 한공간에서 생활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서로 자극이 되고 또한 서로 영적인 감시자가 되는 시간들이 복된 시간이다. 그러나 그도 언젠가는 혼자서 홀로서기의 신앙이 테스트 되어야 한다고 생각된다.
역시 말씀을 아는 힘이 시험을 이기는 첩경이다. 예수님마저도 혼자 계실 때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셨고 말씀으로 이겨내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나는 마귀에게 이길 능력이 없다. 그렇다고 혼자 있는 상황을 피할 수도 없다. 그래서 혼자 출장을 떠날 때마다 말씀을 읽을 목표를 정한다. 다른 거창한 이유가 아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이다. 말씀의 도움 없이는 세상의 유혹에 쉽게 패하는 나를 너무나도 많이 경험했기 때문이다. 깨어지기 쉬운 내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말씀을 읽어야 한다. 혼자 여행하면서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어차피 피할 수 없다. 새로운 환경에 남자 혼자서 여행하면서 밀려오는 수많은 유혹은 피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사업의 기회를 사소한 패배로 인해 그르치기 싫은 까닭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는다는 하나님의 경고때문에라도 육적인 싸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것에 더욱 매달릴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혼자서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머리 속에서 수많은 수필이 쓰여지고 지워지기를 반복한다. 이것이 남는 시간에 멍하게 티비를 보거나 머리를 비워두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다.
작년부터 인도만 여섯번을 다녀왔고 연초에 또다시 들어가야 한다. 94년도에 인도로 첫 출장을 갔었다. 그때는 기업에서 가라고 명해서 갔지만 험하고 지저분한 환경의 인도출장은 별로 내키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원해서 들어가는 지금까지 인도만 열두번을 다녔다. 앞으로도 매년 대여섯 번씩은 인도에 들어가야 한다. 그래서 이제는 인도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교지이고 나와의 인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인도의 인구는 12억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인구가 쓰고 내버리는 생활하수가 제대로 하수처리가 되어서 안전하게 강에 버려지는 부분이 15%에 불과하다. 처리되지 아니하고 버려지는 생활하수는 온갖 질병을 유발한다. 따라서 아직도 인도에는 무궁무진한 하수처리 시설이 지어져야 하고 하수처리시설에 들어가는 기계를 파는 내게는 기회의 땅인 것이다.
그러한 인도의 사업 기회를 보고서 속해있던 휴스턴의 하수처리 폭기업체 해외영업부에 사표를 내고 한국에서 제작되는 기계를 가지고 인도사업을 시작하였으나 원했던 것만큼 결과가 바로 나타나지는 않았다. 될 것 같으면서도 연기되고, 오더를 줄 것 같다가도 다시 경쟁사를 불러들여 가격을 깎는 인도인 특유의 장사꾼기질에 좌절하는 상황이 일년 정도 계속되었다. 다섯 번의 출장 만에야 인도에서 첫 오더를 따 냈다. 기계의 특성상 인도에 설치되고서 성능이 확인되어야 추가 오더가 따른다. 따라서 이제야 시작인 것이다. 포기하지 아니하고 두드리고 다시 또 두드렸더니 인도시장의 문틈이 조금 열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는 사이에 내가 인도인들을 보는 시각도 변해갔다.
90년대 처음 인도에 다닐 때는 솔직히 문화충격이었다. 공항에서 호텔로 들어가는 길에 하늘을 지붕 삼아 누워 자는 수많은 호움리스들. 도처의 수많은 판자촌들.. 호텔을 벗어나면 냄새 나고 더러운 환경. 포장되지 않은 거리에서 입안으로 밀려들어오는 텁텁한 먼지. 외국인들 보면 돈 달라고 쫒아 다니는 아이들.. 오물덩어리 물속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떡진 머리와 인도인 특유의 땀내나는 사람들.. 방치되어 아무데나 어슬렁거리는 일안하는 소들. 그러한 소들을 신으로 취급하는 힌두교와 그 신들을 섬기는 이질적 풍습. 오른손만을 사용하여 게걸스럽게 음식을 먹는 사람들. 틈만 나면 속이려 드는 택시운전사들과 전혀 지켜지지 않는 교통질서. 역시 속이려 드는 호텔과 여행자 상대의 상인들. 불법화된 카스트 제도가 여전히 살아서 인간의 운명을 가르는 모습들. 어디서건 맨발로 다니는 불가촉천민들.. 상대적으로 느끼는 문화적 우월감이 이들을 대할 때 내게 은연중 나타났는지도 모른다. 우리 한국도 이러한 미개함에서 깨어 난지 이제 불과 100년이 넘었을 뿐인데...
인도에 다니면서 내가 힘들어 했던 것이 수많은 인도영혼들을 보면서 선교적 마음보다는 그들을 멸시하는 마음이 앞서는 것이었다. 아니 아직도 힘들어한다. 그래도 이들도 하나님의 형상을 입고 창조된 인간들인데… 그런데 맞다. 문화는 다르고 종교도 다를는지 몰라도 대단한 사상과 신념을 가진 사람들도 많다. 선다싱, 타고르, 간디 등등의 정신으로 세계를 움직인 사람들. 그 동안 인도복음화를 막았던 백인우월사상의 식민정책과 선교정책을 같이했던 실패한 미국/영국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보다 앞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고 엄청난 건축물인 타지마할을 지은 인도는 알아갈수록 껍질이 벗겨지는 양파 같았다. 그리고 속으로 대단한 자부심과 자존감을 숨기고 있는 사람들.. 이들도 사랑 받을 자격이 충분한 하나님의 창조물들이다. 복음이 들어가야 할 12억명의 대상들이다.
지난 몇 달간 묵상하는 말씀이 전도서 11장이다. 묵상할수록 재미있는 말씀이다. “너는 네 떡을 물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 줄지어다. 풍세를 살펴보는 자는 파종하지 못할 것이요 구름만 바라보는 자는 거두지 못하리니 만사를 성취하시는 하나님을 네가 알지 못하리라. 너는 아침에 씨를 뿌리고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 혹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혹 둘 다 잘될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느니라.”
처음에는 그냥 선행을 하라는 말씀으로 읽어버리고 지나 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 적용해야 진리로서는 설득력이 떨어졌다. 장사꾼의 시각에서 본다면 솔직히 전혀 세상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이다. 사업에는 시장조사가 있고, 사업계획이 있고, 전략이 있으며, 포지션닝 이라는 실행방법이 있다. 앞뒤좌우를 살피지 않고 사업을 하는 것은 자살행위이다. 자연히 풍세를 살피고 구름을 바라보아야 한다. 집중하여 남들보다 먼저 미래 먹거리를 선점해야 한다. 이것이 잘될는지 저것이 잘될는지 생각 없이 다 손대지 않는다. 성공가능성을 보면서 움직인다. 일단 손대는 것에는 기회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업적 시각에서 본다면 무조건 떡을 물위에 던지는 것처럼 바보 같은 일이 어디에 있는가? 풍세를 살피지 말고 구름을 바라보지 말라니 이것도 또한 얼마나 억지소리인가?
수수께기 같은 이 말씀을 가지고 꽤나 오래 씨름했다. 이치에 맞지 않는 말씀 같은데도 분명히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진리의 말씀이다. 또한 분명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사업은 이익을 보려는 것이다. 투자는 수익을 기대하는 행위이다. 사업이나 투자는 떡을 물위에 던지라 하는 억지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풍세를 바라보고 구름을 쳐다 보면서 이익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이것이나 저것을 다 손대지 않는다. 잘 될 것을 예상하고 그것에 집중한다. 당연히 떡을 물위에 던지는 행위는 이익을 바라보는 행위는 아니다. 머리 속에서 따지고 계산하고 던지는 떡은 물위에 던지는 떡이 아닌 것이다. 물위에 던진 떡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물길 따라 떠 내려가 버리는데 어디로 떠 내려가는지 도통 알 수가 없다. 이익을 기대할 수 없으니 던져 버리는 떡이 아깝다.
아직도 이 말씀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어렴풋이는 안다. 이 말씀이 믿음이 있어야 이해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물위에 던져 버리는 행위는 땅에 던지는 것과 대비해 대단한 믿음을 요구한다. 땅에 던지는 것은 어디에 떨어질는지 안다. 그러니 던지는 행위가 계산적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물위에 던지는 것은 떡이 어디로 흘러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러니 이것은 대단한 희생적 행위이다. 떡이 손을 떠나는 동시에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믿음이 없이는 떡을 물위에 던지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풍세를 살피지 않고 파종을 하고, 구름을 보지 않고 수확을 꾀하는 것도 믿음의 행위이다. 어차피 풍세를 살펴도, 구름을 보아도 하나님이 함께하지 않으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인 것과 같이 모든 사업적 수고가 헛일일 테니까. 그 동안 사업을 한다면서 하나님 의지 않고 세상의 이치로 풍세를 살피고 나의 생각대로 구름을 보는 행위가 얼마나 허망한 결과를 가져왔는지는 경험적으로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말씀을 다시 묵상하다 보니 이 말씀이 일반적 사업이나 선행보다는 복음전파에 관한 말씀 인 것 같다. 복음전파에 대한 명령으로 이해하니 더 잘 설명이 되었다. 몇 달 동안 포인트를 잘못 잡았다. 그렇다 복음전파는 떡을 물위에 던지는 행위이다. 누군가 받아먹건 그냥 흘려 버려지건 여전히 떡은 물위에 던져야 한다. 이렇게 물위에 던지듯이 하나님의 말씀은 만방에 선포되어야 한다. 선교의 효과가 있던지 없던지, 회개하는 백성이 있던지 없던지 상관없이 복음은 단순히 떡을 던지듯이 전파 되어야 한다고 명령하시는 말인 것 같다. 말 그대로 단순하게.. 기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요즘은 많은 선교기관들과 선교에 관한 책들이 선교의 전략을 얘기한다. 더 나은 효과적인 선교전략을 주장한다. 나도 그러한 선교전략 과정을 몇 개는 수료 했었다. 많은 서구교회들이 인도에 맞춤 선교전략을 가지고 몇백년간 선교를 해 왔었다.
그런데 전도서는 우리에게 복음전파를 위해서 풍세를 살피지도 말고 구름의 방향을 보지도 말라고 한다. 단순히 그냥 떡을 물위에 던지라는 명령만 하신다. 일곱이나 여덟에게 나누어 주라고 한다. 아침에 씨를 뿌리고도 저녁에도 손을 놓지 말라고 한다. 결국은 영혼을 구원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고 판단자는 하나님이니 우리는 단순히 복음을 물에 던지는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보고 복음전파의 실행자가 되라는 것이지 하나님의 자리에서 판단자가 되지 말라는 것이다. 전혀 우리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복음으로 변화되는 것을 본다. 우리 생각과는 반대로 되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들도 목격한다. 그렇다 내가 인도와 인도인들과 그곳에서 일어나는 선교사역들을 판단만 하려 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참으로 많다.
인도만 보아도 난공불락과 같이 생각된다. 도마사도가 2000년 전에 이미 시작한 인도선교이니 도마가 복음을 전한 남쪽 일부의 도시들은 복음화가 되었다. 그러나 복음이 불가촉 천민들에게 들어갔고 인도를 움직이는 대다수 카스트의 윗 클래스인 중상류층이 복음을 거부하는 인도와 인도인들. 복음대신 세상의 형통함을 가져다 준다는 온갖 힌두 신들에게 목숨 거는 이들 인도인. 기회만 있으면 남을 속이려 들고 속여서 얻은 이익도 신의 축복이라 믿는 이 사람들의 모습에서 속상해 하고 포기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속이려 들면 알고도 속아도 주고, 교활한 인간성이 드러나도 그러려니 하면서 포기하지 아니하고 여전히 이 모양 저 모양의 떡을 던져야 한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이 이 던져진 떡으로 어떻게 역사하실는지 우리는 모르니 나는 그저 단순히 던지라는 떡을 던질 수 밖에... 매번 인도들어갈 때마다 보게되는 카운터파트 담당자에게 아직도 복음에의 초대를 못했다. 계속 일년째 기회만 노리고 있다. 매번 비행기를 탈때마다 옆에 앉아서 열댓시간 같이가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겠다고 다짐만하고는 막상 말이 입안에서만 뱅뱅돈다. 여전히 몇년째 준비만 하고있는 내게 준비가 되었건 안 되었건 단순하게 떡을 던지라는 이 하나님의 명령은 참으로 무겁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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