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와 낙하산
172호 정영락 목사
사람들은 생각하는 방향에 따라 낙관주의자가 되기도 하고 비관주의자가 되기도 합니다. 미국의 대공황과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비관주의가 미국을 사로잡을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노만 빈센트 필 박사에 의해서 적극적 사고의 힘이라는 주제가 인기를 끌면서 모든 사회에 낙관주의가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와 함께 미국 경제적 발전에 힘이 더해져 낙관주의가 미국을 점령했습니다. 2006년에 서브라임 모기지 사태가 나면서 낙관적이던 미국 경제가 조금 비관적으로 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역사 가운데 오늘날 미국은 낙관과 비관 사이에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런 낙관과 비관은 삶의 불확실성에서 옵니다. 예상치 못하는 돌발적인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비관주의가 되기도 하고, 낙관주의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 둘이 혼합되어 있는 이 시대에 우리는 어떠한 자세로 믿음 안에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까?
“낙관주의는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기회를 보고, 비관주의는 기회가 올 때마다 어려움을 본다”고 윈스턴 처칠이 말했습니다. 에스겔과 다니엘은 포로기에 회복과 희망을 노래했고, 엘리야와 이사야는 평안할 때 멸망을 예언했습니다. 도넛을 앞에 두고 낙관주의는 맛있는 도넛을 보고, 비관주의는 도넛 가운데 뚫린 구멍을 봅니다. 마크 트웨인은 “48살 이전에 비관주의자이면 무엇인가를 너무 많이 하는 것이고, 더 나이 들어서도 낙관주의자이면 도무지 무엇을 모르는 사람이다”고 말했습니다. 젊은 사람은 많이 남은 시간으로 인해 낙관주의자가 되고 나이 많은 어른들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과 자신이 살아온 사람의 실패들로 인해 비관주의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낙관주의자들은 비행기를 만들고, 비관주의자들은 낙하산을 만듭니다. 이 사회에는 둘 다 필요합니다. 선지자적 비관주의와 제사장적 낙관주의가 필요합니다. 선지자는 죄를 바라보면서 눈물을 흘리면서 걱정을 하고, 제사장은 죄를 치유하면서 회복을 전하기 때문입니다. 낙관주의가 배의 돛이라고 한다면 비관주의는 배의 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항해해 배의 돛은 가고 싶은 곳으로 우리를 인도해 줍니다. 그러나 닻은 바람을 만났을 때 흔들리지 않게 하고 떠내려 가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나 공동체는 닻과 돛이 필요하고, 비행기와 낙하산이 필요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 기억할 것은 낙하산보다 비행기를 더 많이 사용하고, 돛보다는 닻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함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낙하산이 필요 없고, 돛이 필요 없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의 필요성을 알고 잘 사용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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